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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2. 2017

7. 영화로 축제하기, 축제로 영화보기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영화제들 덕분에 씨네필들은 언제나 축제기간이다. 국내 3대 영화제라고 불리는 전주국제영화제(4월 말 ~ 5월 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7월 말), 부산국제영화제(10월 초)가 봄, 여름, 가을을 책임져주고, 연말연초인 겨울엔 시네마테크 등에서 한 해를 결산하는 영화제가 열린다. 그밖에 인디포럼, 서울여성영화제,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정동진 독립영화제 등등 매해 열리는 크고 작은 영화제만 해도 80여 개에 이른다. 2016년 한 해 동안에도 다양한 영화제를 돌아다녔었다. 2편 이상 영화를 관람한 영화제를 리스트로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서울프라이드영화제

상상마당 음악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힙합영화제

메가박스 디즈니 영화제

인디 애니 페스티벌

아시아나 국제 단편영화제

포르투갈 영화제


여기에 각종 기획전과 상영회까지 포함하면 참여한 영화제의 횟수는 더욱 늘어난다. 쭉 써놓고 보니 한 해 동안 참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국내에 영화제가 참 많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제 기간이 겹쳐서 몇몇 영화제는 포기하기도 했었고, 겹치는 시간표에 아쉬웠던 경험도 많다.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제에 참여하기 편리했다는 생각도 든다. 게을러서 놓친 영화제들과 영화들을 되새겨보면 올해는 더 열심히 돌아다녀야겠다. 

정동진 독립영화제의 풍경

처음으로 갔던 영화제는 뭘까 생각해봤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갔던 제 14회 정동진 독립영화제였다. 가족끼리 여행 갈 겸 정동진에 이틀 정도 들었었다.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에 간이 스크린을 설치하고 사방에서 모기향불을 피우며 영화를 보던 정동진 독립영화제의 풍경은 영화와 관련된 국내 행사 중 가장 낭만적인 공간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영화와 함께했던 시간 중 가장 평온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에 본 영화들도 좋았었다. 정대건 감독의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는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출연함은 물론, 고등학생인 나의 방향을 잡아준 영화이기도 하다. 김고은이 출연한 단편영화 <영아>도 관람했었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이 걸린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산을 무너뜨리는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는 고등학생들의 단편 다큐멘터리 <왜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찍는가>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상영한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 말고도 독립영화인들이 많이 왔었다. 권해효 배우를 만나기도 했었다. 영화제는 일반 관객과 영화인들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서 영화제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갔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정동진 독립영화제를 다녀온 이후 한 동안 영화제를 못 갔다. 고등학교를 지방에서 기숙사로 다녔기 때문에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못 보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서울로 오고 나서야 열심히 극장을 찾기 시작했다. 20살이 돼서 간 첫 영화제는 제1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였다. 장르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가고 싶었던 영화제였는데, 멀기도 하고 주요 작품이 대부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 가지 못했었다. 초행길이라 길도 많이 헤맸었다. 일반 상영작 한 편과 심야상영을 봤었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관람했던 영화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였다. 뱀파이어가 현실에 산다는 가정하에 만든 모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였는데, 끝내주게 웃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감독이 현재는 <토르: 라그나로크>를 연출한다는 게 신기하다. 심야상영은 <울프 캅>, <더 사무라이>라는 싸구려 장르영화 두 편과 토브 후퍼 감독의 슬래셔 걸작 <텍사스 전기톱 학살>을 상영했었다. 사실상 토브 후퍼의 영화를 보기 위해 선택한 심야상영이었는데, 역시 호러는 새벽에 봐야 제맛이다. 상영 전에 누군가 환호성을 지르고 다른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공간에 온 것 같았다.


 이후에 도부 천영 화제에는 꾸준히 참석했다. 19회 영화제는 모두가 말하듯 다소 아쉬운 라인업이었지만 소노 시온 감독의 영화를 잔뜩 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리얼 술래잡기>나 <러브 앤 피스> 같은 최신작부터 <길티 오브 로맨스: 욕정의 미스터리>, <두더지> 등의 구작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소노 시온 감독이 직접 부천을 찾아 마스터 클래스와 GV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길티 오브 로맨스> 상영 때 영화의 주연이 자감 독의 배우자인 카구라자카 메구미 배우도 참석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20회를 맞은 부천국제영화제에서는 20년간의 화제작들을 재상영해 장국영의 <이도공간> 등을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필름으로 상영해 더욱 끝내줬던 기억이 난다. <쿵 퓨리>처럼 유튜브로만 보던 단편을 스크린으로 만나는 것도 즐거웠고, <맨 인 더 다크>, <스위스 아미 맨> 등의 장르영화 신작을 누구보다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은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만의 특권이다. 특히 심야상영 작품들이 괜찮았던 해로 기억된다. <좀비 스키장> 같은 쌈마이 한 매력의 영화들로 가득했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풍경

 영화제 하면 부산국제영화제를 빼놓을 수 없다. 2015년에 휴학을 했는데, 휴학의 이유가 부산영화제에 가기 위해서였다. 약간 허무맹랑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휴학의 가장 큰 이유가 부산영화제였던 것은 맞다. 항상 중간고사 기간에 영화제가 걸쳐있기 때문에(그래서 전주영화제는 아직 가질 못했다) 휴학하고 맘 편히 가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여행 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정동진영화제 때는 영화제가 1순위는 아니었다), 혼자 게스트하우스를 잡고 영화제를 보러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게다가 국내 최대의 영화제답게 해운대에 도착하니 이정재가 있고, 밤의 포장마차에서 박성웅과 고아성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맥주에 취한 정재영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영화의 전당에서 진행되는 야외 토크를 통해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거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좋은 영화들을 틀어 줄 뿐만 아니라, 영화인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영화의 장이었다. 


 다이빙벨 사태 이후 위기를 겪은 뒤 개최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참석했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었지만, 상영작 라인업이 공개되고 나선 부산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등 시민>, <아쿠아리우스>, <신 고질라> 같은 국내 개봉이 어려울 것 같지만 꼭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가득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작품들을 미리 만날 수 있는 것도 즐거웠다. 김영란법 때문에 밤의 포장마차가 한산해졌지만,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많았다.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토크를 들을 수도 있었고, <곡성>의 쿠니무라 준이나 <아수라>의 출연진도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치열한 티켓팅을 실패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표를 양도받아 볼 수 있었던 김태리의 <아가씨> GV는 영화제를 다니던 순간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다.

 그 외에도 참 많은 영화제를 다녔다. 충무로 뮤지컬 영화제를 통해 <록키 호러 픽쳐 쇼>와 <영 프랑켄슈타인>을 극장에서 신나게 관람했고, 서울힙합영화제를통해 <도프>,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등의 영화를 여러 힙합 뮤지션 사이에서 보기도 했다. 작품은 영화제를 돌고 돈다고, 부천과 부산에서 놓쳤던 <문워커스>와 <꿈의 제인>을각각 상상마당 음악영화제와 서울프라이드영화제를 통해 만날 수도 있었다. 메가박스에서 감사하게도 디즈니 영화제를 열어 <라이온 킹>, <크리스마스 악몽>, <월-E> 등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들을 드디어 극장에서 관람하기도 했다. 2년 연속 <스틸플라워>와 <재꽃>으로 정하담 배우를 만날 수 있었고, 개막식에서의 논란으로 기억에 남는 서울독립영화제 역시 언제나 좋은 영화들을 상영해주는 감사한 영화제이다. 올해는 무려 226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라브 디아즈의 <떠나간 여인>과 2016년 한국 독립영화 최대 화제작인 <노후 대책 없다>를 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한 영화의 티켓

 사실각 영화제들에 대한 기억만 되새겨봐도 영화제마다 A4 두세 장 분량의 추억들이 쏟아진다. 영화제라는 것이 단순히 주제에 맞춘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감독, 배우, 스탭-이 관객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장이고, 영화에 관련된 모든 행사가 진행되는 축제이다. 영화를 틀고 관람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사고팔거나, 영화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기도 한다. 영화라는 키워드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영화를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 사이의 묘한 연대가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제를 찾는 이유를 꼽자면 수 십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다. 국내 개봉이 불투명한 영화를 보기 위해서, 보고 싶은 화제작을 미리 보고 싶어서, 극장 개봉 시보다 싼 가격에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회고전 등을 통해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기 위해, 영화만을 위해 극장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그곳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영화제를 찾는다. 영화제라는 명칭부터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힘이 있다. 밤샘 심야상영에 피곤해도 극장 근처에 맛집을 찾아다니며 영화를 볼 생각에 눈이 떠지고, 하루에 4편을 관람하는 강행군에도 체력이 버텨준다. 매번 멀리 영화제에 가는 순간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잠깐 현실에서 벗어나 꾸는 꿈. 사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유가 그것이다. 현실과 차단된 공간에서 꿈을 꾸기 위해 영화를 본다. 영화제는 꿈의 시공간을 축제가 벌어지는 모든 공간으로 증폭시킨다. 영화제는 영화에 흠뻑 빠져 있을 수 있는 순간이다. 올해도 달력을 넘겨보며 어떤 영화제들에 참석할 수 있을지를 알아본다. 마침 5월 황금연휴와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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