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9. 2021

'시작' 밖에 없는

<듄> 드니 빌뇌브 2021

 프랭크 허버트의 6부작 소설 [듄]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드니 빌뇌브의 <듄>은 원작의 1부 중 절반 정도 분량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폴(티모시 샬라메)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사막 행성 ‘아라키스’로 떠난 레토(오스카 아이작), 제시카(레베카 페르구손), 거니(조시 브롤린), 던컨(제이슨 모모아), 유에(장첸) 등의 아트레이데스 가문 사람들과, 이들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 라반(데이브 바티스타), 파이터(데이빗 다스트말치안) 등의 하코넨 가문, 그리고 ‘프레맨’이라 불리는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챠니(젠데이아)와 스틸거(하비에르 바르뎀) 등 수많은 인물로 꾸며진다. 영화의 포스터나 예고편 등을 통해서는 노출되진 않았지만,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타이틀에선 ‘Part. 1’이 따라붙는다.

 때문에 이번 <듄>의 이야기에 대해선 정말 할 말이 없다. 이번 영화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처럼 시리즈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임과 동시에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파트 1>이나 <헝거게임: 모킹제이 파트1> 같은 영화들처럼 한 편의 영화를 여러 이유로 쪼개어 개봉한 것과 유사한 사례다. 즉 <듄>(파트1)은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하코넨 가문의 대립, 여러 귀족 가문 및 제국과 황제의 존재, 아라키스라는 배경, 우주항해에 필수적인 물질인 ‘스파이스’ 등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에 그친다. 드니 빌뇌브는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선보이는 대신 원작의 이야기를 과감히 축약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는 등의 각색 대신 가능한 그대로 영상화하는 것에 집중한다. 영화화보단 영상화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법한 정도로.

 드니 빌뇌브의 근작들은 어떤 음모 혹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는 대신 순응함을 택하는 구조를 선보인다. 그리고 순응에 앞서 주인공의 미래를 보여주는 수많은 단서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의 케이트는 자신이 알레한드로나 맷과 같은 ‘늑대’가 될 것임을 깨닫고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어라이벌>의 루이즈는 영화에서 플래시포워드로 표현되는, 헵타포드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인 이후의 관점으로 나아간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선 데커드의 존재 자체가 K의 미래를 앞서 선보인다. <듄>에서 그것은 폴이 종종 보게 되는 꿈과 환영이다. 그가 보는 꿈과 환영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보여주는 일종의 예언이다. 문제는 이야기의 단서가 되는 존재들, <시카리오>의 ‘늑대’, <어라이벌>의 플래시포워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데커드, <듄>의 꿈과 환영은 그 자체로 영화의 서사 구조를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때문에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 남는 것은 자신 앞에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주인공을 관찰과 그가 겪는 고통과 고뇌의 전시다.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관객에게 넘겨진다. 즉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자신의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지지, 조롱, 비판, 동정 등 모든 것을 포함한) 어떠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둔다. 시리즈의 시작이자 둘로 나뉜 영화의 파트1인 <듄>은 그러한 무책임함을 발휘하기에 가장 적절한 작품이다.

 폴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의 지루함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비주얼이다. 기묘하고 조악한 (그래서 나름 즐겁기도 한) 이미지로 가득한 데이빗 린치의 <듄>에 비하면 드니 빌뇌브의 <듄>은 사막화가 충분히 진행된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는 것만 같다. 아라키스의 황량한 사막, 그곳에서 스파이스를 수확하는 거대한 기계들, 잠자리를 닮은 비행선, 데스스타를 연상시키는 제국의 군함, 린치의 영화 속 디자인을 더욱 거대하고 매끄럽게 탈바꿈한 거대벌레 등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특히 IMAX를 통해 관람한다면 더욱 인상적이다. 다만 이는 이야기의 지루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처럼 거대한 액션, 가령 무언가 폭파되고 붕괴되는 모습의 웅장한 스펙터클은 잘 그려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격돌하는 백병전은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상황이 <듄>에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이는 (용산)IMAX의 1.43:1 화면비가 근접격투를 담아내는 것에는 단점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표현하는 각 인물들의 방어막 시스템의 연출이 대단히 혼란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듄>의 비주얼은 도입부 밖에 존재하지 않는 155분짜리 영화를 덜 지루하게 해 주지만, 그뿐이다. 소설을 영상으로 일대일 대응시킨 영상화가 훌륭한 영화화가 아닌 것과 같다.

 IMAX 이야기가 나온 김에 꺼내는 말이지만, <듄>은 영화 전체가 IMAX 화면비(용산이라면 1.43:1, 다른 곳이라면 1.9:1)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하코넨 가문이 아라키스를 점령했던 과거사를 보여주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IMAX 화면비로 시작된 영화는 몇 숏 지나지 않아 일반적인 화면비가 등장한다. 같은 시퀀스 안에서부터 요동치는 화면비는 1.43:1 화면비의 거대한 IMAX 스크린에서 그 거대한 격차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전환이 연출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령 잠자는 폴의 모습을 일반 화면비로 보여주고 꿈속 장면을 IMAX 화면비로 보여주는 장면은 꽤나 효과적이다. 다만 그 이외의 장면에선 대체 어떤 기준으로 IMAX 화면비가 사용되는지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구난방이다. <어벤져스> 3, 4편이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처럼 영화 전체가 IMAX 화면비를 유지한다던가, 최소한 놀란의 영화들처럼 한 시퀀스 안에서 화면비가 유지되는 정도였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비스타, 스코프, IMAX 화면비를 마구잡이로 오가던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와 다를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1.41:1의 거대한 화면으로 구현된 아라키스의 풍광은 아름답지만, 들쭉날쭉한 화면비는 짜증만 유발한다. 게다가 1.43:1 화면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접격투를 담아내는 데 최악의 화면비다. <듄>의 모든 격투 액션은 이 화면비로 등장한다. 심지어 IMAX 화면비로 격투를 담아내다 격투 이후 칼 끝에서 흐르는 피를 일반 화면비로 보여주는 편집은 어처구니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쯤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와 제대로 실패한 액션 히어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