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9. 2021

국가보안법, 이질감의 정체

<그림자꽃> 이승준 2019

 평양시민 김련희는 치료를 위해 중국에 머무르다 남한에 가면 빠르게 돈을 벌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브로커에게 속아 여권을 빼앗긴 채 남한에 도착하게 된다. 도착하자마자 국정원에게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간첩 혐의다. 살아남기 위해 전향서에 서명한 그는 2021년 현재까지도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부재의 기억>을 통해 한국 다큐멘터리 최초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션 되었던 이승준 감독의 신작 <그림자 꽃>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김련희 씨의 행적을 쫓는다. 그 동안 김련희는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갖은 시도를 반복한다. 대한민국 국적의 여권을 취득해 중국으로 가보려 하기도 하고, 밀항과 같은 방법을 알아보기도 한다. 남한을 방문한 북한 아이스하키 선수단을 쫓아가보기도, 베트남 대사관을 찾아 망명을 시도하기도, 문재인과 김정은의 판문점 회담을 지켜보며 희망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남한에 머물러 있다.

 <그림자꽃>은 성실하게 김련희의 시간을 기록한다. 2014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행유예 3년과 보호관찰을 선고받은 그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비자발적 탈북자’라는 기묘한 위치에 놓인 김련희의 삶을 밀착취재한다. 김련희가 북한으로 돌아가 병중에 있는 부모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딸과 적적한 생활을 이어가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실은 간단하다. 북한과의 대치상황 속에서 북한을 다른 나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 이는 곧 국가의 자존심의 문제로 연결된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냉전시대의 발명품으로 표현되는 국가적 자존심은 그것이 누군가의 인권을 짓밟는다 해도 오로지 스스로를 수호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국가보안법이 수호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법 자체다. 2017년 개봉한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가 다룬, 한 개인이 북한 매체 ‘우리민족끼리’의 트윗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오로지 자존심뿐임을 드러낸다. <그림자꽃>은 그와 같은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림자꽃>은 김련희만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김련희처럼 간첩죄를 선고받은 뒤 귀국하지 못해 수십년을 남한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등장한다. 한 인물은 26세의 아내와 2살배기 딸을 북한에 두고 왔고, 지금은 딸이 50대가 되었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판문점 선언 이후 이루어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그는 그가 만나고자 한 모든 친인척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영화의 카메라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북한으로 향한다. 영화는 두 차례에 걸쳐 평양에 있는 김련희 가족을 방문한다. 이 장면에서의 평양은 남한에 붙잡힌 김련희를 담아내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긴다. 사람들은 일하고, 지하철과 노면열차를 타고, 지인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고, 가족들과 식사한다. 어쩌다 한 번씩 양 국가의 감시를 피해 전화통화나 페이스북 메시지를 주고받긴 하지만, 이들은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할 수 없다. 북한의 가족들에서 김련희로 전환되는 세 번의 순간은 <그림자꽃>을 쉽게 잊을 수 없는 영화로 만든다.

 물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양쪽의 존재는 이 영화 속에서 같은 행동을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다. 버스를 탄 남편과 버스에 탄 김련희, 식사를 하는 남편/딸과 홀로 식사하는 김련희, 평양에 있는 그들의 집에는 세 사람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사진 속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사진에서 합성된 것마냥 서로 다른 공간에 속해 있는 것 같다. <그림자꽃>은 이 이미지가 전달하는 이물감의 정체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 밖에 없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