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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0. 2021

무대라는 세계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비하하기

<아네트> 레오 까락스 2021

 영화가 시작되면 으레 등장하는 제작사의 로고들이 등장하기 전 레오 까락스의 음성이 먼저 들려온다. 야유나 박수 같은 반응은 물론 하품과 방귀 같은 생리현상, 심지어 숨소리까지 금지하려는 폭력적인 경고와 함께 숨을 참는 관객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등장하면 녹음실에 앉아 있는 레오 까락스가 보인다. 녹음 부스 안에는 영화의 음악감독 스파크스(Sparks)가 있다. <아네트>의 첫 노래 “So May We Start?”가 시작되면 스파크스와 코러스 보컬은 녹음실 바깥으로 나간다. 각각 헨리, 안, 작곡가로 출연하는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먼 헬버그가 대열에 합류하고, 레오 까락스 또한 동참한다. 오프닝 크레딧은 화면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주듯 각 인물의 등장에 맞춰 나타난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는 연기를 준비하는 배우처럼 누군가가 건네주는 의상을 받아 입는다.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을 끝으로 롱테이크가 마무리되고, 두 주연배우는 자신의 배역이 되어 떠난다. <아네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철저히 반(反)뮤지컬적이다. 거의 모든 대사가 노래로 구성되며 현장 녹음을 택한 <아네트>는 기존의 할리우드 뮤지컬들이 자신의 영화 속 가상 세계에 대해 설정한 리듬과 멜로디를 통해, 들뢰즈가 명시적인 꿈의 상태와 명백히 구별되는, 몽상, 백일몽, 낯섦, 마법과 같은 상태를 통해 존재하는 상태에서 시지각적, 음향적 이미지는 세계의 운동으로 연장되는 이미지라 말한 세계-이미지를 구축한다. <아네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에 대한 거센 거절이다.

 <아네트>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헨리와 오페라 배우인 안이 사랑에 빠진다. 둘은 딸 아네트를 낳는다. 안은 계속 성공하지만 헨리는 점점 실패한다. 관계 회복을 위한 요트 여행에서 술에 취한 헨리는 안이 폭풍 속에서 죽게 만든다. 자신의 쇼를 해낼 수 없는 헨리는 안과 같은 목소리를 지닌 아네트를 공연하게 한다. 하지만 아네트는 무대에서 “아빠는 사람을 죽여요”라 말하고, 헨리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아네트>는 비극이다. 그것도 정말 고전적인. 흥미롭게도 헨리는 반(反)비극을 자신의 예술적 수단으로 삼는다.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비극을 조롱한다. 관객은 무대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환호와 야유를 전한다. 반면 안은 고전적인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한다. 그는 수많은 고전 비극 속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안이 무대 위에서 죽은 이후에야 박수로 반응한다. 태생부터 비천한 예술과 교양 시민의 고급 예술 사이의 차이. 이는 영화와 다른 예술의 오래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는 헨리 위로 안이 연기한 수많은 죽음들이 떠오르는 장면은, 두 사람이 속한 예술 사이의 어떤 격차를 보여준다. 이는 두 사람의 무대를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레오 까락스는 전작 <홀리 모터스>는 영화의 존재방식과 그 양태에 대한 아포리즘이었다. 그는 <아네트>에서 <홀리 모터스>의 아포리즘을 한 편의 영화로 통합하려 한다. 화면을 종횡무진하며 영화라는 시각기계의 작동과정을 체현하였던 <홀리 모터스>(그리고 <도쿄!>)의 광인(드니 라방)이 사라진 자리는 무대 위의 두 배우가 대체한다. 여기서 ‘무대’는 문자 그대로 헨리와 안이 각각 서게 되는 무대들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영화 자체의 무대이기도 하다. <아네트>는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해 브뤼셀, 쾰른, 본 등 다양한 지역에서 촬영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지역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의 많은 공간은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으며, 스크린 프로세스가 적극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장면이 안이 죽게 되는 요트 여행 장면이다. 요트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일렁이는 파도는 스튜디오에 설치된 움직이는 요트 장치 뒤 거대한 스크린의 영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트는 진작에 뒤집혔을 것이다. 요트 위에서 격정적으로 노래하는 두 사람은 화면 바깥의 스탭들이 열심히 퍼 나르는 물이 뿌려진다. <아네트>의 세계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철저히 부정되는 것처럼, 어떤 규칙과 리듬으로 표현되는 일관적인 세계-이미지가 아니다. 그곳은 무대 위의 연극배우가 웃긴 표정을 지은 한 관객을 보고 극본에 없는 웃음을 터트릴 때 제4의 벽이 붕괴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가상성을 노출시키고 붕괴시키는 세계다. 헨리와 안의 딸 아네트가 인형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붕괴의 구심점이다.

 <아네트>에는 야외 촬영처럼 보이는 장면이 많지 않다. 많은 장면은 두 사람의 무대, 두 사람의 집, 스튜디오임이 분명한 공간들에서 촬영되었다. 이 공간들은 스스로가 영화의 ‘무대’임을 숨기지 않는다. 레오 까락스가 관객들의 그 어떤 시청각적 반응도 허락하지 않는 내레이션을 집어넣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말을 비꼬듯 영화에 등장하는 첫 관객, 즉 헨리의 [신의 유인원] 쇼의 관객들은 웃고, 무대 위의 헨리에게 말을 건네고, 노래한다. 다만 헨리가 스탠드업 코미디의 관객들과 코러스처럼 주고받는 반응들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가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레오 까락스의 공언처럼 코러스는 금지되었다. 그것은 헨리의 무대가 무대로 성립되지 못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며, 안의 오페라는 그것이 철저히 수호되는 공간이다. 때문에 그 공간에서 안이 연기하는 죽음(들)은 온전히 그 무대 위에 있기에 ‘실재’로 받아들여지는 죽음이며, 오페라의 결정적 순간이 된다. 반면 헨리가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죽음은 죽음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영화가 안이 연기하는 죽음(들)의 영적인 면모들을 디졸브로 강조할 때, 헨리가 연기한 죽음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영화 중반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던 안은 뉴스를 본다. 화창하고 푸른 날씨의 바깥과 다르게, 뉴스 속 캘리포니아는 산불에 휩싸여 있다. 잠시 잠든 안이 꿈에서 접하게 되는 헨리의 미투 폭로 뉴스나 두 사람의 일상이 담긴 가십성 보도가 완전한 가짜의 영역에 속해있음을 드러내는 것과 반대로, 안이 틀어둔 뉴스 속 산불은 영화 밖 현실에서 벌어진 산불의 이미지다. 뉴스 속 산불과 대비되는 안이 속한 세계는, 그와 헨리라는 내적 대립으로 인해 붕괴될 뿐 외부로 인해 붕괴되지 않는다. 요트 여행 장면에서처럼 영화가 프레임을 통해 가리고 있는 무대와 미장센의 성립조건은 영화가 위태로운 가상세계임을 전제한다기보단 스스로 붕괴하는 그 세계를 가까스로 지탱하는 것에 가깝다. 안이 죽고 난 뒤 헨리는 자멸의 길을 걷고 아네트는 그것의 방아쇠가 된다. <아네트>는 뮤지컬임에도 현장에서 녹음된 노래만을 사용한다. 유일한 예외는 성대를 지니지 않은 ‘인형’ 아네트의 노래뿐이다. 달릴 때도, 물속에 머리를 처박힐 때도, 상대방에게 커닐링구스를 해줄 때도 멈추지 않고 계속 노래하던 이들과 달리, 아네트는 오로지 완성된 영화일 때만 노래할 수 있다. 이는 <아네트>가 하나의 동일한 가상으로 통합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아네트가 노래하자 헨리의 세계는 망한다. 이는 죽은 안이 성대 없는 인형인 아네트의 몸을 빌어 내린 저주임과 동시에, 무대라는 세계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비하하는 비천한 예술이 맞이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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