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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1. 2021

반성문 혹은 자기 위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2021

 14세기의 프랑스 북부지역,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 장(맷 데이먼)은 마르그리트(조디 코머)와 결혼한다. 장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수많은 전투를 함께 해온 자크(아담 드라이버)는 장이 집을 비운 사이 마르그리트를 강간한다. 자크는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권력을 등에 엎은 자크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장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 재판을 신청한다.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중세 유럽, 고대 로마, 현대 중동 등을 배경으로 남성적인 인물을 내세운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에이리언>, <델마와 루이스> 등 영화사에서 잊힐 수 없는 여성 캐릭터/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던 리들리 스콧이 오랜만에 ‘여성 서사’라 부를 수 있는 이야기를 가져왔다. 에릭 재거의 『마지막 결투: 실제로 일어난 범죄와 스캔들과 결투 재판의 기록』(국내 출판명은 영화와 동일)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프랑스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소재로 한다. 

 영화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OOO의 진실”이라는 제목이 붙은 각 부는 장, 자크, 마르그리트 세 주인공의 시점에서 같은 시간대를 재구성한다.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도 조금씩 다르게 연출되어 있다. 가령 1부에서 장이 자크를 구했다고 말하는 전투 장면이 2부에서 실은 자크가 그에 앞서 장의 목숨을 구해줬음이 드러난다. 1, 2, 3부에 모두 등장하는 장과 자크가 다툼을 벌인 뒤 재회하는 장면은 각 부에서 모두 다르게 연출되었다. 가령 1부에서는 장과 자크가 손을 맞잡고 다시 갈등을 빚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것만으로 끝난다. 2부에서는 그 행동 이전에 자크가 결혼식을 찾은 여성들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으며, 화해의 증표인 마르그리트의 입맞춤을 격한 키스로 이어가려는 시도가 드러난다. 마르그리트의 시점인 3부의 장면은 2부와 거의 동일하지만, 1부에선 등장하지 않았던, 자크가 다른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대사가 짧게 들려온다. 

 1부와 2부는 남성인 장과 자크의 시점으로 편집되어 있다. 1부만 본다면 장은 다소 거칠고 독선적이지만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나름 다정한 면모가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2부는 전형적인 성범죄자의 변명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만 같다. 2부 초반 피에르의 파티에서 성노동자들과 일종의 술래잡기 게임을 하던 것은 자크가 마르그리트를 강간하는 장면에서 재현된다. 자크는 그것을 ‘의례적 거절’인, 사실상 승낙의 뉘앙스인 것으로 본다. 3부는 1부와 2부가 모두 조금씩 편집된 것임을 드러낸다. 장은 1부에서 그려진 것처럼 다정하지 않으며, 아내와의 사랑보다 가문과 자신의 명예, 성주였던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장과 마르그리트가 대부분 같은 눈높이에서 촬영된 것과 다르게 3부에선 마르그리트가 장을 올려다보는 숏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도 한다. 1부에서 장의 대사로만 언급되었던 몇몇 사건은 2부와 3부에서 전혀 그의 말처럼 전개되지 않았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3부에서의 자크는 어떠한가? 자크가 마르그리트를 강간하는 장면은 2부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마르그리트의 비명과 눈물, 표정을 보여준다. 심지어 2부와 3부에서 자크가 내는 신음소리마저 다르다. 2부의 자크는 마르그리트를 짝사랑하는 자신에 도취된 정도였다면, 3부에서 자크가 내는 소리는 짐승의 것처럼 들린다.

 3부를 알리는 간자막은 1, 2부의 간자막과 다르다. 다른 간자막이 등장했다 바로 사라지는 것과 다르게, 3부에서는 ‘진실(The Truth)’라는 단어가 조금 더 오래 남아 있다. 마르그리트의 시점인 3부는 장과의 결혼식에서 장이 지참금에 대해 마르그리트의 아버지와 다툼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1부와 2부에서도 끊임없이 눈을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해내려던 마르그리트의 모습은 3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마르그리트는 장을 정말로 사랑했을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마르그리트가 14세기 카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했던 것들이다. 그는 생존을 위해 ‘아내의 의무(후계자 출산)’을 해야 하고,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는 결혼을 해야 했으며,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여성혐오와 성역할을 견뎌내야 한다. 다시 말해 <라스트 듀얼>은 <라쇼몽> 풍으로 풀어낸, 하지만 명확한 진실이 존재하는 한 여성의 생존기다. 당시 법적으로 ‘인간’이 아닌 장의 소유물이었던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힘으로 자크를 고소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결투 재판이라는 형식은 단순히 장의 목숨과 가문의 명예를 건 싸움이 아니라, 마르그리트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싸움마저 자신의 육체와 목소리로 진행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미투 운동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드라마는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라스트 듀얼>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미투 중 하나를 매끄럽게 다루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지점은 미투 운동이 한창 전개될 당시 성추행이 폭로되었던 벤 애플렉과 그를 지지하였던 맷 데이먼이 이 영화의 주연과 각본, 제작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던 두 사람은 여성 각본가인 니콜 홀로프세너를 영입해 3부를 쓰게 하였다. 영웅적(이지만 찌질한) 남성상을 그려내려는 1부, 성범죄자의 변명인 2부가 3부와 전혀 다른 시선을 지니는 것이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맷 데이번과 벤 애플렉 두 사람의 반성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벤 애플렉이 원래 자크 역을 하려 했으나 스케줄 문제로 인해 아담 드라이버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이 지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두 사람이 리들리 스콧의 카메라를 경유해 제출한, 나름대로 준수한 반성문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기만에 가까운 행태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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