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안공간 루프에서 진행된 [박재훈 개인전: 실시간 연옥]의 작품 대부분은 '가상 파빌리온(virtual pavilion)'의 형태를 하고 있다. 댄 그레이엄(Dan Graham)이나 E.A.T. 등이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선보여온 파빌리온은 공간을 현실/비현실, 역사/탈-역사, 환상/실재, 내부/외부, 의식/무의식 등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그것을 다시 횡단하거나 전이시키는 등의 방식을 취한다. 박재훈의 '가상 파빌리온'은 실제로 건축된 파빌리온처럼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전시장의 스크린, 모니터, 벽에 영사되는 무빙-이미지로 존재하는 '가상 파빌리온'이 점유하는 공간은 그저 그 이미지가 담긴 매우 납작한 평면 뿐이다. 3D 모델링으로 구현된 박재훈의 가상 파빌리온은 백화점의 회전문, 네덜란드의 풍차, DMZ를 표상하는 사물들,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의 진열장, 샤워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입자가속기, 태양/죽은 나무/형광등/대전차 지뢰 또는 카톨릭 성당의 향로/빙하 조각/의료용 호스/중동 지역의 카페트 등으로 각각 제작되어 있다. 이것들이 '가상'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구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물리적으로 가동할 수 없는 구조, 장소와 크기의 문제, 구조물을 뚫고 들어가기도 하는 탈-신체적 카메라의 움직임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3D로 구현된 가상 파빌리온은, '파빌리온'이라는 용어가 건축에서 기인한 것임에도, 건축물에 대해 관객이 가질 수 있는 촉각적 작용이 불가능하다. 즉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 혹은 오래된 성당에 대해 말했던 촉각적-시지각적 경험은 가상 파빌리온이 영사되는 스크린/모니터/벽 앞에서 미끄러지게 된다. 이 미끄러짐은 본 전시의 작품들이 구현하는 감각, 가상으로 재현되었으며 끝없이 루핑(looping)되는 자본주의, 국가, 자연, 종교, 기술, 전쟁의 표상에 직접 접촉하는 대신 무빙-이미지의 운동 방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공명한다. 작품 속 가상 오브제들은 게임개발자들에 의해 제작되어 인터넷에 업로드된 레디메이드 오브젝트(Ready-Made Objects)들을 가져온 것이다. 가상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ready-made) 것들 앞에서 미끄러져내리기, 그 감각의 낙차가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가상-이미지 속의 천국과 연옥을 만들어낸다.
2. 우연인지 최근 연달아 본 전시 세 곳의 전시 내 텍스트에서 로지 브라이도티를 인용하고 있었다. 합정지구에서 열린 [카밀6]와 N/A의 [identi-kit: The People's CHoice]에서는 『변신』(그리고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세포 내 공생(endosymbiosis)' 개념)이, 아트선재의 [트랜스포지션]에서는 전시 제목과 동명의 책이 인용된다. 신유물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도 하고, 이제 막 들뢰즈 입문서들을 읽어보던 참이라... 이 텍스트들을 마주할 때마다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브라이도티와 신유물론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3. 백필균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낙원상가에 위치한 D/P와 5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하여 진행된 [P는 그림을 걸었다]는 흥미로운 기획이 돋보였다. D/P의 벽을 가득 매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회화들은 유튜브, 제페토, 메터포트, 믐 플랫폼, 인스타그램에서 오프라인 전시장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정된다. 가령 유튜브에선 게임의 3인칭 시점처럼 퍼포머의 등을 따라 광각으로 인해 왜곡된 전시장을 마주하게 된다. 제페토에서는 홍민키의 디자인을 통해 평면이 아닌 다른 형태로 변형된 회화들을 마주할 수 있다. 메터포트는 전시장의 축적을 그대로 가상공간에 구현하며, 믐 플랫폼은 그림의 크기를 실제와 달리한 공간을 거닐 수 있다. 인스타그램은 오프라인 전시장을 포함한 각 전시장이 소개되고 교통하는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P는 그림을 걸었다]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전시장에서 회화가 온전한 평면의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시한다. 회화는 사진 파일로 변환된 뒤 '가변크기'의 존재가 된다. 이는 단순히 회화를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혹은 잘라내어 인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페토에서 구체가 된 회화들을 보고 있자면, 동시에 NFT(Non-fungible Token) 시장에서 거래되는 디지털 회화들의 소식을 듣고 있자면, 예술작품과 아우라, 전시가치와 제의가치에 관한 어떤 재배치(?)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지난 주에 관람한 친구들의 전시 [행성아웃]의 한 작품을 덧붙이고 싶다. 김희조의 작품은 전시에 참여한 다른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토대로 작가들의 아바타를 PC게임 <심즈2>에 구현한 작업이다. 물론 김희조 작가 또한 게임 내 아바타로 구현되어 있으며, 자신은 게임 속 자신과 같은 복장을 입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게임 속 아바타들의 외형은 다른 작가들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한다기보다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그들이 되고싶은 모습을 구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게임 내 작가-아바타들의 성격과 행동도 그러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심즈2> 속 작가와 전시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실제 작가들은 유사할 뿐 다른 존재다. 게임에 구현된 작가는 실제의 모방이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실제 작가의 모습과 충돌한다. 그것은 작가들이 '되고 싶은', '바라는', 혹은 '자신이 설명한 자신'에 그치기 때문이다. 2004년 발매된 <심즈2>는 최근의 여타 게임에 비해 질적으로 불안정한 그래픽을 선보인다. 이 그래픽은 실제 작가와 게임에 구현된 작가 사이의 충돌을 가시화하는 장치가 된다. 메타버스라는 공간은 그러한 충돌이 전면화되는 공간이며, 미술작품, 작가, NFT를 통해 유통되는 작품/밈/다양한 컬렉션 등은 메타버스 바깥의 실재와 조응함과 동시에 불화하고 있다고, 두 전시/작품은 말하는 듯하다.
4.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를 찾기 전에 본 권시우 미술평론가의 SNS 글이 인상적이었다.
전시 전반이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적 무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본주의, 테러리즘, 소수자 혐오, 온갖 가십으로 도배된 가짜 뉴스들, 기타 등등, 자신이 귀속된 제도의 부조리를 얼추 자각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저항의 행위조차 결국 밈(meme)과 유사한 이미지/클립으로 해소돼버리는 상황에 과적응한 개인들이 (작업을 매개로) 형성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양상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탈출'의 시도는 소위 미디어-행동주의와 대척점에 놓여있고, 오히려 자족적인 유희에 가깝다. 결국 망했고, 지금도 급진적으로 망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납득한 채, 그저 관성에 따라 각자 유희를 반복하면서, 어쩌면 모두가 은연 중에 망함을 낙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섣불리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관전 포인트.
DIS의 <공익광고> 시리즈 중 <왕좌의 게임> 속 아이스킹을 등장시킨 <절호의 위기>나 캠피(Campy)한 외양의 사람들과 중세적 복장의 사람들을 교차시켜 피임과 자본주의 사이를 이야기하는 <기본소득: 이성애자의 트루바다>가 이번 비엔날레에서 전시되었다. 두 작품은 한껏 과잉된 편집과 냉소적인 내레이션으로 경제 체제에 비판을 가한다. 무니라 알 카디리의 <비누>는 부유한 아랍인만이 등장하는 걸프만 지역 TV 드라마 위에 다양한 이주민 노동자의 모습을 조악하게 합성함으로서 그것을 조소한다. 역시 조악함을 내세운, '스파게티 웨스턴'과 오키나와 음식인 '친빈'을 합성한 제목 <친빈 웨스턴: 가족의 재현>을 선보인 야마시로 치카코의 작품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필비 타칼라의 <마음이 원한다면(리믹스)>는 실제 스타트업 행사 위에 냉소적인 내레이션을 덧붙이고, 브리스 델스피제의 <바디 더블> 시리즈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침실의 표적>(원제는 <Body Double>)이나 구스 반 산트의 <아이다호>를 패러디하며, C-U-T의 <KALEDOSCOPE>는 '스웨디시 케이팝 보이밴드'를 표방하고, 폴 파이퍼의 <구현하는 자>는 저스틴 비버(팸플릿엔 루이스 폰시Luis Fonsi가 누락되어버렸다)의 'Despacito'를 커버하는 아이들의 유튜브 영상을 사용한다. 리우추앙의 인상적인 작품 <러브 스토리>는 중국의 쇠락한 도서 대여점에서 수집한, 80~90년대 지방에서 도시로 이주해온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로맨스 소설 속 낙서들을 전시한다. 이 낙서들은 당시 이주노동자들의 아카이브가 된다. 이 작품들에서 TV드라마/영화/케이팝/패션/대중소설 등의 대중문화는 전유/공격/인용의 대상으로서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고, 그것은 권시우 평론가의 말대로 '자족적인 유희'에 가깝다.
[하루하루 탈출한다]에서 눈에 띈 것은 두 작품이다. 하나는 홍진훤의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v2.0>이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대사에서 작품의 제목을 가져왔음에서 직감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유튜브를 비롯한 대형 플랫폼의 수익 창출을 추구하는 알고리즘과 인터페이스를 '시각 권력'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교란할 수 있는 대안적인 영상 구독 플랫폼 <DESTROY THE CODES>를 제안한다. 링크(http://www.destroy.codes/)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이 플랫폼은 구독자들이 직접 알고리즘 바깥에 있는 영상을 플랫폼에 보내고, 그것을 다른 구독자들로 하여금 시청하게 하여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교란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배제되고 있는, 다시 시각화 해야 할 유튜브 영상의 주소를 우리에게 보내십시오. 링크들은 프로젝트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고 무작위로 추출되어 매일 구독자들에게 발송됩니다. 영상을 찾기 위한 자발적인 검색 과정은 검색자의 추천 알고리즘을 더욱 교란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와 홈페이지의 '제공하십시오' 문구는 아주 단순한 차원의 트롤링을 방지할 수 없다. 누군가 이 홈페이지에 '구독자 100만 유튜버'들의 영상 링크를 잔뜩 공유한다면? 알고리즘을 교란하기 위한 작전은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교란되고 와해될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실체 없는 익명들에 의해 구조화된 유튜브 알고리즘을 되찾고자 하는 실체 없는 익명들.
다른 하나의 작품은 아이사 아이사 혹슨의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이다. 2019년 작가가 결성한 '필리핀 슈퍼우먼 밴드'는 헌신적인 여성 화자를 내세운 팝송 '슈퍼우먼'을 여러 언어로 개사해 부른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를 적극적으로 인용한다. 단순히 음악적으로 케이팝을 모방했다는 것이 아니라, 뮤직비디오와 의상, 안무 등 케이팝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적극 끌어온다. 이는 '스웨디시 케이팝 보이밴드'라는 C-U-T의 시도와 질적으로 다르다. 후자가 케이팝의 초국적적, 종종 발견되는 젠더횡단적 면모를 끌어온다면, 전자는 케이팝의 오랜 컨셉 소재인 '여전사'를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상황에 기입한다. 결연한 표정의 '필리핀 슈퍼우먼 밴드' 멤버들의 모습은 자족적 유희라기보단 결연한 운동가의 얼굴로 다가온다. 2016년 이화여대 시위에서 소녀시대의 "다시만난 세계"가 불려진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케이팝 노래가 세계 곳곳의 투쟁 현장에서 울려퍼진 것을 떠올린다면,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에서 전유된 케이팝이 단순한 유희의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5. 김화용, 이길보라가 기획하고 보안여관 1942에서 개최된 [몸이 선언이 될 때]는 임신중절, 타투, 트랜스젠더라는 세 축을 바탕으로 신체의 횡단과 주권에 대해 말한다. 전시를 보고 든 첫 생각은 용어에 대한 것이다. 낙태가 아니라 임신중절, 문신이 아니라 타투, 성전환자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인 이유. 페미위키에서는 "낙태에 사용되는 낙이라는 글자는 윤락, 타락 등'윤리와 결부된 단어에서 많이 사용되는 글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유교 전통에서 문신은 야만인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렇기에 일종의 형벌로 기능했다. 또한 '문신'이라는 단어는 조직폭력배 등이 애용하던 이레즈미(入れ墨) 스타일의 타투를 먼저 연상시키는데, 이는 노태우 정권 하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던 때부터 꽤 최근까지 폭행, 조직폭력배, 병역기피 등 부정적인 인식과 맞물려 인식되었다. 또한 의료법상 의료면허가 없는 이들이 시술하는 것은 불법이며, 올해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이를 합법화하기 위한 법안 발의가 있었다. 민주당 박주민 등도 비슷한 개정안을 내놓았지만, 여기서의 용어는 '문신사법'이었으며 류호정의 경우 '타투입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래아한글이나 맞춤법 검사기 등을 이용하면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종종 성전환자로 교정되곤 한다. 하지만 성전환자는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젠더만을 전제하고 있으며, 젠더를 '횡단'한다는 의미에서의 용어 '트랜스'를 온전히 번역해내지 못한다. 즉 임신중절, 타투, 트랜스젠더는 68년 전에 만들어져 당대의 사회적 인식이 들어간 형법상의, 오랜기간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온전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는 번역의 용어를 가치중립적이며 본래의 의미를 지닌 용어로 대체한다.
[몸이 선언이 될 때]에서 이 용어들은 기존의 용어들과 교차된다. '나', 엄마, 할머니의 임신중절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길보라의 <My Embodied Memory> 은 낙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전규리의 <산증인>은 형벌로서 문신이 새겨졌던 한국전쟁 포로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일렉트라 케이비의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 돌봄과 상호 원조의 급진적 가족 구조, 사이보그와 여성 신을 중심으로>는 횡단하는 주체로 존재하는 트랜스젠더의 신체와 경험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A-P-P(The Archive of Public Protests, 거리 투쟁의 아카이브)의 아카이브, 올라 야시오노프스카의 피켓,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현수막, 키라 데인&케이틀린 레벨로의 임신중절에 관한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미즈코> 등과 공명한다. 그 중 눈길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강라겸의 두 작품이다. 영상설치작품 <난자 두 개로 태어난 새끼 쥐의 꿈을 꿔>와 회화 <소원도>는 임신중절, 타투, 트랜스젠더가 신체와 젠더를 횡단하는 방식을 SF의 방법론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관객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분할되지 않는 신체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몸이 선언이 될 때]가 기록하고 전시하는 횡단하는 신체(들)은 '횡단'함으로써 고정되고 분할되는 신체를 넘어서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법원 앞에서, 작업실에서, 병원에서,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투쟁해온 이들의 역량이 현동화됨으로서 가능해진다. 용어의 낙인과 가치판단을 넘어, 고정된 것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신체들을 이 전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