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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07. 2021

자신이 되어가는 밤 산책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2020

 학교를 졸업한 배우 지망생 지훈(이승훈)은 돈이 없다. 아나운서로 취직한 여자 친구 아름(한해인)은 지훈을 떠났다. 알바비는 밀리고 직장을 구하려면 배우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던 중 공무원으로 일하는 지인 영우(임영우)에게 일자리 제안을 받는다. 자살 예방을 위해 밤중에 한강을 순찰하는 비밀 프로젝트이기에 배우 활동과 병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훈은 순찰에 나선다. 그러던 중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은영(박서은)을 만나고, 두 사람은 함께 밤중의 서울 곳곳을 산책한다. 임정은 감독의 <아워 미드나잇>은 흑백 화면을 통해 서울의 밤공기를 담아낸다.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지만 학교 졸업장 외엔 무엇도 이룬 바 없는 지훈과, 사내연애 중 데이트 폭력을 당한 뒤 그것을 공론화했다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은영, 두 사람의 상황은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지훈의 입장에서 회사에 다니는 은영은 각자의 꿈을 포기한 채 취직해 살아가는, 아름을 비롯한 주변 친구들의 모습과 같다. 은영의 입장에서 지훈은 회사의 사내정치나 사회생활이라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상황은 대비를 이룰지언정, 두 사람이 지닌 고충의 원인은 유사하다. 지훈은 영우를 만나러 간 카페에서 어떤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남성은 회사의 뜻에 따라 적당한 퇴직금을 주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고, 상대방인 여성은 그 사실을 모른다. 꿈을 뒷받침해주는 것도, 그렇다고 생계를 위해 들어간 회사에서 노동자를 보호해주는 것도 없다. 술 취한 지훈의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각자의 상황에서 그나마의 최선을 챙기며 각자도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훈과 은영은 목적지도 규칙도 없는 산책을 떠난다. 동작대교에서 출발해 종로 서울극장까지 이어지는 두 사람의 산책은 각자를 압박하는 현실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처럼 다가온다. 지훈은 은영에게 “처음 만나는 사람의 특권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이라 말한다. 배우인 지훈은 자신이 아는 여러 이야기들을 꺼내고, 은영은 그것을 듣는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속에서 각자가 지닌 압박과 곤란함이 드러난다. 밤 산책은 그것들을 훌훌 털어놓을 수 있는 해방적인 시간은 아니다. 산책이 끝난 뒤에도 지훈은 옥탑방과 연습실을 오가며 살아가고, 카페에서 목격했던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 망신당하기도 한다. 은영은 회사를 위해 적당히 합의하자는 부장의 말을 들어야 한다. 밤 산책은 언뜻 무엇도 바꿔 놓지 못한, 단지 두 사람이 각자의 사정에 공감해주고 마는 자족적인 시간처럼 느껴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특권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산책의 특권은 무엇일까? 산책의 특권은 무목적성이다.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걷고,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꺼내고, 아무도 없는 밤거리에서 크게 소리 내 노래를 불러보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압박은 지훈과 은영을 비롯한 청춘을 짓누르는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이다. 목적 없는 산책은 거기서 잠시 벗어난 시간을 선사한다. 그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는 것은 그림자다. 영화는 두 차례에 걸쳐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그림자가 걸린 벽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지훈은 은영을 폭행했던 전 애인을 연기해주고, 은영은 연기하는 지훈을 상대로 자신이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내려한다. 이는 자기 자신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 할 수 없는 행위다. 거울 속 자신, 혹은 거울 속 자신과 같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는 것은 자족적인 행위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자신이 지워진 그림자를 통해 진행되는 두 사람의 그림자극은, 발화의 대상을 자신이 아닌 어떤 존재로 향하게끔 한다. 

 이는 어떤 문제를 밖으로 투사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은 아닐지언정 자신의 형상을 띠고 있다. 영화가 지훈과 은영을 일대일로 대비시키는 대신 함께 산책을 떠나게 한 것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거울상이 아니라 함께 서 있는 그림자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자는 거울처럼 대상을 따라 하지만, 그것은 실루엣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림자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대상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가 되게끔 한다. <아워 미드나잇>의 밤 산책은 그저 자족적인 신세 한탄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되지/하지 못한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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