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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2. 2021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후기

<흐르다> 김현정 2021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람한 대구의 독립장편영화들 대부분에 공장이 등장한다. 2017년작인 고현석의 <물속에서 숨 쉬는 법>부터, 올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감정원의 <희수>, 김용삼의 <혜영, 혜영씨>가 그런 작품들이었다. <은하비디오>, <나만 없는 집>, 작년의 <외숙모>까지 꾸준히 단편영화를 선보여오던 김현정의 신작 <흐르다>도 공장을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취준생 진영은 종종 아버지의 공장에서 어머니의 일을 돕는다. 어느 날, 사고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수가 적은 아버지와 공장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아버지가 못마땅한 진영 둘만이 남는다. <흐르다>는 제목처럼 흘러가는 두 사람의 삶을 담아낸다. 어머니의 사망이라는 불가피한 사건으로 인해 둘 만이 남은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흐르다>의 전부다. 영화는 김현정 감독의 단편영화들과 같은 리듬으로 나아간다. 느릿하지만 성실한, 동일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앉아있는 위치와 자세만으로 심정적인 변화를 잡아내는 것. 이번 영화 또한 그러한 순간을 포착해내며, 이설 배우는 그것을 훌륭하게 연기해낸다. 죽음, 부도, 결혼, 워킹홀리데이는 가족을 흩어 놓지만, 이는 이미 흩어진 가족이 드디어 흩어진 것일 뿐이다. 어머니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가족은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을 향하는 것은, 진영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장면에서 화면 바깥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한 계단의 모습과 반환점을 돌아 화면에서 먼 곳으로 가려는 진영의 방향의 대비가 보여주듯, 고통스러운 과거를 뒤로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은 식구(食口)이며 동료이지만 동시에 걸림돌이자 발에 박힌 그릇 조각과도 같다. <흐르다>는 그 관계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부녀관계가 흘러가는 것을 담아낸다.

<멜팅 아이스크림> 홍진훤 2021

 올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흥미롭게 관람한 작품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의 작가 홍진훤의 신작이다. 영화제를 통해 그의 작품이 소개되는 것은 (아마도) 처음인 듯 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견된 필름 뭉치에 대한 이야기다. 필름이 저장되어 있던 창고가 수해를 입으며 필름은 진흙탕에 버무려졌고, 그것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수해로 인해 훼손된 필름을 복원하는 것은 필름에 저장된 80~9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의 기록이 지워질 위험을 내포한다.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고 복원하려 할 수록, 이미지는 필름에서 지워진다. 이미지가 지워진 필름은 그저 투명할 뿐이다. 영화의 인터뷰이들은 386세대의 민주화운동이 그러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문민정부와 참여정부가 들어오지만, IMF 이후의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가속화와 그에 따른 비정규직, 고용차별, 우경화 등의 결과를 남겼다. 투쟁은 그때도, 지금도 이어진다. 한 인터뷰이는 당시 학생운동의 구호가 텅 비어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그것의 내용은 없고,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당시의 기록을 들춰볼수록 그것은 투명한 공백이 된다. 그 공백은 현재까지도 진행되는, 당시와 같으면서 다른 투쟁을 일으킨다. 수해로 훼손된 필름은 녹아내린 물감이나 아이스크림처럼 이미지를 뭉개버린다. 비디오 캠코더와 저화질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된 90년대 말~00년대 초의 투쟁현장은 소위 말하는 "깍두기 현상"으로 가득하다. 열화된 이미지들, 열화된 기록들은 필름에서 이미지가 지워지듯 공백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그 공백 위로 행인들의 모습이 담긴 슬로우모션과 다양한 이유로 투쟁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삽입한다. 공백을 채우는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가 기록된다. <멜팅 아이스크림>은 노동자들이, 학생들이, 여성들이, 소수자들이 계속 투쟁해야 하는 한 반복될 공백과 채움의 역사에 관한 영화다.

<세친구> 임순례 1996

 임순례 감독의 첫 장편영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세 친구 무소속(김현성), 삼겹(이장원), 섬세(정희석)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만화를 그리는 무소속은 계속 공모전에 지원하지만 낙방하고, 일본만화를 배껴그릴 것을 제안받는 것에 분노한다. 고도비만인 삼겹은 더 살을 찌워 군대 면제를 받으려 한다. '여성적인' 성격의 섬세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미용사 시험을 준비한다. 세 친구의 모습은 주류의 삶과는 다르다. 부모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사회적 남성성을 인정받기엔 이룬 것이 없거나, 너무 게으르거나, 남성답지 못하다. 남성성을 과시하며 여성과의 섹스로 그것을 쟁취하고 인정받으려 발버둥치던, <세친구> 이후 20여년 후 제작된 이병헌의 <스물> 속 세 친구와 이 영화의 세 친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졸업식에서 시작해 군입대 즈음 시기를 보여주며 끝난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정상적인 남성성, 차후 결혼하여 가부장이 되어야 하는 남성이라면 갖춰야 할 능력들을 갖추지 못한 세 친구의 삶은 무기력과 절망감 사이를 오갈 뿐이다. 동네 건달은 물론 학생들에게까지 돈을 뜯긴다거나, 정상성과 남성성을 얻기 위해 혹은 도망치기 위해 군대에 가고 싶어하거나 그 반대의 이유로 군대를 면제받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은 커녕 무기력함만이 가득한 세 친구. 임순례의 두번째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루저들이 그러하듯, 갓 스무살이 된 <세친구>의 주인공들 또한 계속하여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연민과 관찰을 오가는 임순례의 카메라는 남성성을 정상적으로 획득하지 못한, 혹은 획득할 수 없는 남성들의 모습을 너절하게 담아낸다. 

<섬이 없는 지도> 김성은 2021

 영화는 2018년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 야스민이 감독의 카메라에 남긴 편지에서 시작한다. 난민 이야기로 시작하는가 싶던 영화는 강정 해군기지, 제2공항 건설, 과거 제주에서 벌어진 학살, 정권에 의해 강제이주당한 주민들 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에는 비자발적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 등장한다. 난민, 수몰지역 주민, 빨갱이로 몰린 사람, 이민자부터, 인간에 의해 제주로 넘어온 외래종 동식물과 역시 인간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토종 동식물, 별장, 호텔, 공항, 군사기지 등의 건축물과 무기, 심지어 신까지. <섬이 없는 지도>는 제주도를 구심점삼아 비자발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옮겨야 하는/했던 존재들의 이야기다. 그 변화는 모두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제주도 토박이일지라도 제2공항 건설에 모두가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 등의 외지인일지라도 제주도를 누구보다 사랑할 수도 있다. 제주라는 섬을 둘러싼 욕망과 투쟁은 끊임없이 교차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진행하는 예술적 퍼포먼스, 항의로서의 거주, 문화제, 천막농성, 집회 등은 그것들이 교차되는 장으로서, 제주도에 살아가거나 오가는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제주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공간이 된다. 영화는 그 공간을 포착해내며, 대상화된 어떤 곳으로 존재해왔던 제주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홍콩 민주화운동 등을 넘나드는 영화의 범주는 다소 산만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2021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이자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연기자이자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각본가인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와 살아간다. 어느 날 아내가 외도를 벌이는 것을 목격한다. 얼마 안 가 아내는 급사하고, 가후쿠는 복잡한 감정에 빠진다. 2년 뒤, 가후쿠는 연극 레지던시 활동을 위해 후쿠시마로 향하고, 그곳의 소개로 운전수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오가면서 대화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동차라는 한정되고 좁은 공간 안에서 대화가 벌어지는 것을 찍고싶었다고 감독의도에 적고 있다. 전작 <우연과 상상>의 1부 속 자동차에서의 대화, <아사코> 중후반부의 고속도로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가 자동차를 아예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 우연은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하는 일은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는 도쿄에서 했듯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아시아 각국의 배우들이 각자의 연어로 연기하도록 연출한다. 연기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새로운 정체성을 뒤집어쓰는 행위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연기는 일종의 광기의 행위이며, 광기를 관객 앞에서 드러내는 일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를 못박고 가는 듯하다. 프레임 아래에서 등장한 오토는 가후쿠와의 섹스 중 떠올린 이야기를 말한다. 가후쿠는 이를 듣고 기억해 아침에 오토에게 들려준다. 오르가즘을 통해 탄생한 광기 중에 있는 이야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 쓰여진 이야기를 연기한다는 것, 모두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를 오가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가후쿠와 미사키, 또는 히로시마 연극에 참여한 배우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는 자동차에서 대화를 나누며 광기의 출처는 결국 자신임을 인지하고, 거기서부터 다시금 뻗어나가는 방법으로서의 연기를 배운다. 이는 가후쿠의 연극에 참여한 농인 배우 유나(박유림) 등도 마찬가지다. <해피 아워>에서 주인공인 네 친구를 묶고 가르던 워크샵과 여행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연극과 자동차를 통한 이동은 인물들이 갈등을 벌이는 장이 됨과 동시에 그것이 해소되는 장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모든 캐릭터들이 고통을 표현하지만, 내가 촬영장에 있던 모든 배우들에게서 느낀 것은 연기의 즐거움이었다."라고도 말했다. 극 중 가후쿠는 연기를 펼치던 유나와 제니스(소냐 위엔)를 보며 "두 사람이 연기하던 중 무언가 일어났다"며, "그것을 관객들에게도 일어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것을 해내는 영화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2021

 재일조선인의 딸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을 피해 오사카로 넘어온 사람이다. 한국어는 대화 속 '어머니', '아버지' 등 몇몇 단어로만 남은 지금, 양영희 감독은 오랜 세월 동안 남한 독재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활동가로 살며 세 아들을 평양으로 보낸 어머니의 삶을 되짚어 본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닭 수프 레시피를 알려주던 어머니는 어느새 알츠하이머를 앓고 기억을 잃어간다. 마침내 제주도를 방문해 4.3 희생자 위령제에 참여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찾아가지만 어머니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기억하기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에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4.3과 남한에 대한 기억을 기억 저편으로 잃어버린 것일까? 기억을 잊어가는 중에도 북한 노래는 잊지 않고 부르던 감독의 어머니는 4.3 위령제에서 배운 적도 없는 애국가를 최대한 따라부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만 같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공습으로 인해 제주도 사람인 부모님과 제주도로 온, 그곳에서 다시 군부 독재 정권을 피해 일본으로 온, 그리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는 대신 북한 정부를 지지하기로 한, 그러나 말년에는 제주도를 방문하여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그의 모습. 이데올로기 간의 전쟁으로 인해 비자발적 이주를 거듭하던 그가 마침내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선택을 했을 뿐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선택들로 이루어진 삶을 보여준다.

<성덕> 오세연 2021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프리미어 이후 여러 영화제에서 매진행렬을 이어가고 있는 작품. '정준영 바라기'로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한 정준영의 '성덕'이었던 감독이, 2019년 3월 버닝썬 게이트 이후 생겨난 '덕질'에 관한 감정들을 풀어 놓는 작품이다. 감독은 비슷한 사정을 지닌 주변 친구들을 찾아간다. 같은 정준영의 팬부터, 승리, 온유, 용준형, 최종훈, 박유천, 강인 등의 아이돌 스타의 팬, 가을방학의 전 멤버 정바비의 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팬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성범죄, 음주운전, 폭행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을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지지하는 팬들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진 않지만, 자신과 주변 '덕후'들의 의견을 모아 그 이유를 탐색한다. 여전히 그 사람을 믿어서? 그 사람은 우상적 존재라서? 그런 짓을 할 수 없는 순수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연쇄적이로 따라 붙는 질문 속에서 감독은 답을 찾지 못한다. '성덕'이었던 감독은 이제 그의 팬이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애매한 위치가 되었다. 하지만 분노로 시작한 <성덕>은 분노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분노는 남아있지만, 감독은 지난 7년 간의 덕질이 분노로 귀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건 이후 자신이 느끼는 것의 정체를 찾기 위한 감독의 여정은 굿즈 장례식을 치르고, 2016년 정준영의 성범죄를 처음 보도했던 기자를 찾아가 당시 팬들의 악플에 관해 사과하고, 헌정사상 첫 탄핵된 대통령인 박근혜의 지지자들을 만나는 등으로 이어진다. 그 여정을 쫓으며 알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사실 하나는 "덕질은 비합리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 비합리적인 행위를 위해 팬들은 돈과 마음과 시간을 쏟아 붓는다. 덕질의 결과는 기억이다. 정준영의 사인이 담긴 종이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감독은 그것이 기억을 담고 있기에 쉽게 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돈과 마음과 시간을 쏟아 부었던 때. 덕질이 남긴 것은 그 시간에 대한 기억과 함께 덕질했던 사람들이다. 덕질의 대상이 범죄자가 되었다고 해서, 덕질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말미에 등장한, 성범죄 폭로 이후 자살해버린 배우 조민기의 팬이었던 감독의 엄마는 덕질의 대상이 연예인이었을 뿐이지 누군가를 사랑하고 마음을 쓰며 성장한 것은 똑같지 않느냐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수차례 기차를 탄다. 그는 정준영 만나러 가기 위해 처음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고 한다. 수없이 반복할 행위를 처음 하도록 만드는 대상, 감독이 '성덕'이었을지라도 자신의 지역을 떠나보지 않은 채 덕질을 했다면 거침없이 전국을 오가는 지금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덕>은 그러한 처음을 가능케 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수많은 '덕후'들, 무엇인가를 열렬히 좋아해본 적 있는 사람들, 지금은 <성덕>을 덕질하는 관객들까지, <성덕>은 이들이 각자 품어오던 마음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크나큰 계기가 되어준다.

<모어> 이일하 2021

 이태원 클럽 '트랜스'에서 진행된 드랙쇼로 시작하는 영화는 드랙퀸이자 무용가 모어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는 우연히 자신의 공연을 본 <헤드윅>의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존 카메론 미첼의 초청을 받는다. <모어>는 뉴욕에서 진행되는 스톤월 항쟁 50주년 공연에 참여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담아낸다. 그 시간 속에는 고향에 찾아 부모님과 가족을 만나는 모어, 러시아인 애인과 동거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순간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은 모어가 춤추는 장면들이다. 드론캠을 동원한 화려한 카메라워크는 모어의 공연을 가능한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려 노력한다. 때문에 종종 <모어>는 모어의 삶이나 뉴욕 공연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기보단 전기적 성격의 다큐멘터리가 가미된 퍼포먼스 영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지점에서 <모어>는 모어라는 인물의 매력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일본 내 혐한 시위대를 초-폭력적으로 저지하는 전직 야쿠자들을 담은 이일하 감독의 전작 <카운터스>, 재일조선인 학교의 권투부를 담아낸 <울보권투부> 또한 그랬다. 대상의 매력은 가능한 담아내면서도, 그 이상의 구성이 돋보이지는 않는다. 

<플레이백> 미야케 쇼 2012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넷플릭스 드라마 <주온: 저주의 집>으로 알려진 미야케 쇼의 초기작. 이번 서울독립영화제 해외초청 섹션에 함께 초대된 하마구치 류스케와 종종 함꼐 소개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러 저서와 인터뷰에서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는 필로와의 인터뷰에서 주목하는 일본의 신진 감독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와 미야케 쇼를 꼽았는데, 두 사람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숏을 찍는다"는 무책임한 발언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플레이백> 또한 그런 작품이다. <플레이백>은 건강도 좋지 않고, 아내와는 헤어졌고, 작품은 잘 풀리지 않는 영화배우 하지가 고향 친구의 결혼식에 가게 되는 이야기다. 영화는 하지의 이야기를 단선적으로 풀어내는 대신 꿈, 죽음 이후, 과거와 현재 등을 마음껏 뒤섞는다. 혼란스러운 시공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영화의 거의 모든 숏에 등장하는 하지의 존재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세 주인공을 쫓던 섬세한 동선, 비좁은 공간 속에 붙잡힌 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듯한 <주온: 저주의 집>의 카메라는 <플레이백>에서 미리 찾아볼 수 있다. <플래이백>의 기묘한 시간의 흐름, 다소 갑작스런 시간과 공간의 이동은 하지의 존재를 담아내는 숏들을 통해 전개된다. 섬세하게 세공된 느낌은 아니지만, 스크린을 흑과 백으로 수놓으며 끊임없이 과거(들)로 돌아가는 하지, 이 영화의 숏들은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점이 아니라 계속하여 반복되고 변주되는 시간의 지속 속에 있는 것임을 숏 속에 존재하는 하지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컨버세이션> 김덕중 2021

 첫 장편영화 <에듀케이션>에서 붕괴하고야 마는 관계를 담아냈던 김덕중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 <컨버세이션>은 제목 그대로 대화를 담아낸다. 은영(조은지)와 승진(박종환)을 중심으로 그들과 그 주변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이 흩어진 퍼즐조각처럼 영화에 등장한다. 이들의 대화들은 시간적인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도 않고, 주제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파편적인 대화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마지막 장면에서야 큰 움직임을 보여주는 고정된 카메라의 롱테이크로 대화들을 담아낸다. <컨버세이션>은 제목이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대화 장면을 촬영하는 감독의 능수능란함을 보여준다.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이 몇 명인지, 이들은 친구인지 손님인지 고객인지 잠재적 연애대상인지, 서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참을 말하고 어떤 거짓을 말하는지, 이는 이들의 대사를 일일이 곱씹어보며 생각하기 이전에 이들이 앉아있는 위치와 그들을 담아내는 구도를 통해 즉물적으로 감지된다. 하지만 김덕중의 영화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는 작년 <에듀케이션>에 대한 호평들을 읽으면서도 생각했던 것이다. 김덕중은 두 영화에서 파열 직전까지 나아가는 대화, 롱테이크로 촬영된 대화장면 속에서 오가는 다양한 질의 압력들을 바로 느낄수 있도록 포착해낸다. 하지만 그것들의 집합인 영화는 어떤가? 아직 김덕중의 영화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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