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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0. 2021

유동적-금속적 정체성에 관해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2021

*스포일러 포함


 <티탄>을 보면서 여러 영화를 떠올렸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들, <터미네이터>, <로보캅>, <알리타: 배틀엔젤>, <매트릭스> 속 금속(기계)과 결합된 유기체(신체)들, <철남>이나 <미트볼 머신> 같은 일본의 B급 영화 속 기계-신체들. 조금 웃기지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스>에서 매그니토에 의해 철근이 몸에 박힌 울버린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른 영화는 존 카펜터의 <크리스틴>이다. 자동차와 결합한다기보단 자동차를 성애의 계기로 삼는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보단, 악령이 들린 자동차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과 집착적 애정을 가지며 알파-메일로 각성하는 이야기인 <크리스틴>이, 자동차와 섹스를 나누고 임신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티탄>의 이야기와 조금 더 결이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티탄>은 <크리스틴>처럼 마초적인 남성성을 획득하려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동차에 ‘크리스틴’이라는 여성 이름을 붙이는 작품도 아니다. 

 <티탄>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요소는 주인공 알렉시아(아가트 루셀)의 임신한 신체다. 자동차와 성교를 하고 난 이후 임신한 알렉시아는, 충동적으로 (부모를 포함해)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다. 그러던 중 10년 전 실종된 남자아이의 나이 든 모습을 추정하여 그린 포스터를 보고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 생각하여 머리를 깎고 눈썹을 밀고 코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압박붕대로 가슴과 임신한 배를 조여 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후반부 알렉시아가 진통을 겪는 장면이다. 두 세 차례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알렉세이의 배가 갈라지고 뱃속에 있는 자궁과 같은 것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알렉시아의 머리에 삽입된 티타늄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다. 즉 그것은 금속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2>의 T-1000과 같은 액체 금속 같은 것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를 출산한 알렉시아의 배는 임신했을 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배는 압박붕대에 의해 형태가 변형된다. 알렉시아의 뱃속 금속은 단단한 금속이나 수은 같은 액체금속이 아니라, 그의 다른 몸속 장기들처럼 유기체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금속 신체. 알렉시아의 몸에 대한 이러한 설정과 묘사는 필요에 따라 젠더를 넘나들며 존재하는 그의 삶과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정체성은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고로 인해 머리에 티타늄이 삽입된 알렉시아처럼, 신체는 유동적이다. 신체와 함께 젠더도, 나이도, 얼굴도, 모두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유동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이다. <티탄>은 무척 단단한 느낌의 제목과 다르게 유동적인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두 중심인 알렉시아와 뱅상(뱅상 랭동)의 정체성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알렉시아는 살인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연쇄살인을 저지른 뒤 10년 전 실종된 남자아이인 것처럼 위장하여 도망친다. 그러한 그를 거둔 것이 소방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중년 남성 뱅상이다. 뱅상은 변장한 알렉시아를 자신의 아들 아드리앵인 것으로 대한다. 이는 단순히 알렉시아의 속임수가 잘 먹혀들었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드리앵으로 살아가기 위해 알렉시아는 압박붕대로 상체를 동여맬 뿐 아니라,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말도 하지 않는 등 어딘가 이상한 행동을 이어 나간다. 스테로이드로 보이는, 노화로 인한 체력 저하를 막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는 뱅상의 모습은 남초 집단인 소방대 대장으로 살아가기 위한 중년 알파-메일의 고군분투다. 그러한 상황에서 뱅상이 알렉시아를 아드리앵으로서 받아들이는 모습은, 설령 그가 자신의 진짜 아들이 아님에도 가족으로 함께하겠다는 선택이다. 

 다시 말해, <티탄>에서 유동적인 정체성을 지닌 이는 알렉시아 뿐만이 아니다. 뱅상 또한 알렉시아를 아들로 대함으로써, 더 나아가 알렉시아가 아드리앵이 아님을 명백히 알게 된 상황 이후에서도 그를 가족으로 대함으로써, 알파-메일로서 남성성을 굳건히 하고자 했던 실패한 가부장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나아간다. 쥘리아 뒤쿠르노는 알렉세이와 뱅상이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각자 다른 정체성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이들의 정체성을 무엇이라 확정 짓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자신의 이름이 알렉세이라 뱅상에게 말하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태어난 금속-유기체 신생아를 안고 있는 뱅상의 모습에서,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중심이 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유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름과 젠더를 바꿔 지내왔던 알렉세이는 자신이 결국은 알렉세이라는 것,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는 것만이 남은 뱅상의 정체성 (뱅상이 훈련하는 장면에서 본 환영을 통해 아드리앵은 죽었으며 뱅상이 그것을 못 받아들이고 실종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티탄>은 “그렇게 해서 그들이 무엇이 되었나”를 정해주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각자를 규정하는 중핵만을 남겨둔 채,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변화할 수 있는 미지수로 둔다. 그리하여 탄생한 신인류, 알렉시아가 낳고 뱅상이 받은 금속-유기체 아기에 대해서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한없이 유동적이며 변화를 거듭하는, 고정된 정체성 바깥의 존재들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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