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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7. 2022

2022-02-07

1.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면서 이정범의 <악질경찰>을 봤을 때와 비슷한 불쾌감을 느꼈다. 단순히 세월호 등 사회적 이슈를 선정적인 이야기 속에 집어넣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에 세월호 참사, 코로나19 팬데믹 등 거대한 사건들은 물론 왕따, 학교폭력과 같은 사회적, 구조적 폭력이 보도되고,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발화되는 과정이 이미 선정적이다. 두 작품에서 그러한 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선정적이라고 욕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를 보고 폭력이 확산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다. 넷플릭스가 아시아, 특히 최근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한국 콘텐츠를 통해 "빻은", "PC하지 않은" 서사와 이미지를 "IP우회"의 방식으로 생산 및 소비한다는 말은 정말 지루한 오인의 레퍼토리나 다름없다. 세계 각국에서 생산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의 썸네일과 시놉시스만 봐도 그런 말은 안 나올텐데 말이다. 여하튼 두 작품을 보고 느낀 불쾌감은 단순히 작품 속에서 이런저런 실제 사건들이 등장하고 사용되는 방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명백히 세월호 참사를 의식하고 있는 <지금 우리 학교는> 속 몇몇 대사("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대사나 "가만히 있으라"는 말들)와 후반부의 노란 리본은 <엑시트> 등 소위 포스트-세월호라 묶일 수 있는 한국 재난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삽입된 것만 같은) "좀비 특별 전형" 1인 시위 장면과 같은 것을 보고 있자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사회비판적 요소랄 것들 모두가 진심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삽입된 것만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가령 다른 학생들과 동떨어져 학교를 빠져나와 공중화장실에서 출산한 뒤, 주인공 청산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치킨집에 들어가 좀비가 되고마는 한 학생을 떠올려보자. 이 학생은 극 중에서 이름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으며, 드라마의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독자적인 서브플롯으로 기능한다. 미혼모인 그의 이야기는 그가 낳은 아기가 경찰 송재익을 통해 격리구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빠져도 충분하다. 이 서브플롯은 신파로 기능하지도, 그가 좀비가된 이후의 회차에서 송재익이 아기를 구출하는 것에서의 감동으로 작용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드라마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면서 캐릭터를 활용한 일종의 유희적 서사-중단의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원작에 있던 캐릭터도 아니다. 그가 본래는 청산과 온조 무리와 결부되는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었지만 편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사회비판적 요소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 속 사회비판적 요소는 "우리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고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천만영화가 되려면 액션과 코미디와 로맨스가 모두 들어가야하며 적절한 타이밍에 신파코드를 넣어 관객들을 울려야한다는 흥행공식과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사회비판" 코드는 <스위트 홈>이나 <오징어 게임>과 같은 선례가 그러했듯, 흥행코드로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지옥>은 차라리 양반이다)


2. 영상자료원에서 진행중인 "재팬파운데이션 무비페스티벌 - 자매여, 영원하라!"을 통해 나루세 미키오의 초기 유성영화 <소문난 딸>과 마스무라 야스조의 <미모에 죄가 있다>를 봤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나다야 식품상점을 길 건너편 이발소에서 담아내는 유려한 오프닝 씬과 짜임새 있는 각본이 인상적이지만, 불현듯 삽입되는 작은 동작들의 클로즈업 숏과 대사 음상 사이의 괴리감은 아직 유성영화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사 수를 줄이고 간자막이 삽입되었다면...하는 생각을 짧은 러닝타임 동안 하게 되었다. <미모에 죄가 없다>는 전후 일본에서 세대 간, 지역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세 커플, 여섯 남녀의 이야기는 도쿄 인근의 토지 재개발, 신세대, 구세대적 문화와의 단절 등이 촘촘히 엮여 등장한다. 87분 남짓한 러닝타임 속에서 소화하기에 무리한 것 아닌가 싶지만, 영화는 그 수많은 의제들을 빼곡히 집어 넣는다. 압권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수십년 동안 한 가문이 살아온 집을 떠나는 요시노는 짐을 실은 차에 탄 채로 집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 다음엔 그의 두 딸과 그의 집에서 일하던 청년들, 즉 영화의 주인공인 세 커플이 각자의 삶을 찾아 살아가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화면은 다시 요시노의 얼굴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달아 보여주는 그리피스적 몽타주라기보단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집을 떠나는 요시노가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다시금 요시노의 얼굴로 장면이 바뀌는 순간, 이는 확신이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요시노가 "본" 미래는 확정적인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라기보단 바람이다. 그들은 요시노가 "본" 것처럼 살 수 있을까? 


3.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아카이브81>은 재밌는 오컬트 호러였다. VHS 복원가이자 아키비스트인 주인공 댄이 우연히 맡은 테이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가 살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을 탐색하다 휘말리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VHS의 룩을 활용한 호러는 계속하여 등장하고 있고, 이 작품의 제작자인 제임스 완의 <말리그넌트>나 두 에피소드의 연출자인 아론 무어헤드&저스틴 벤슨 콤비가 <V/H/S> 시리즈에 참여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설정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기존에 VHS 룩을 활용하던 작품들이 파운드푸티지의 형식을 취했던 것과 다르게, 관람자이자 탐구자인 복원가/아키비스트가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다는 지점이 <아카이브81>만의 차별점이다. 물론 그렇기에 아쉬운 지점도 존재한다. 극 중 댄이 복원하고 관람하는 비디오 테이프는 댄의 시선을 경유할 때에만 VHS에 기록된 영상으로 등장한다. TV 스크린을 통해 카메라는 아예 과거로 들어가 VHS의 룩이 아닌 깔끔한 고화질을 선보이고, 다시금 튕겨져 나와 댄으로 이어지는 경우에 VHS 화면으로 되돌아온다. 철저히 댄의 입장에서, VHS에 기록된 이미지만을 통해 과거에 접근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답답함은 늘었겠지만 말이다.


4.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아이 웨이웨이: 인간미래]의 영상작업 디스플레이는 최악이다. 그의 작업을 몰아서 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국내에선 주로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던 그의 영상(사실 영화 작업이라 부르는게 적확하겠지만)작업들을 좁은 공간에 설치된 몇 대의 모니터에 몰아버린 것은, 애초에 작품을 감상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물론 러닝타임 150시간인 <2003년 베이징> 같은 작업은 애초에 전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코로네이션>, <유랑하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처럼 러닝타임이 1~2시간 반에 달하는 작품들을 그러한 공간에서 관람하게끔 하는 것은 오히려 관람객을 전시장 바깥으로 밀어내는 배치나 다름없다. 모종의 이유가 있을거라 추측해볼 뿐이지만, 이럴거면 필름&비디오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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