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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Oct 25. 2020

그만하고 싶다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

다섯 번째 임용고사를 치르고, 펑펑 울었다. 나는 또 떨어졌다.


뺨에 붙은 눈물이 차가운 바람을 맞아서 얼굴에 있던 수분을 다 빼앗아가는 바람에 볼이 따끔거렸다. 길거리에서 엉엉 울고 두 볼이 빨개진 채로 버스를 타고 밤 늦게 집에 간 기억이 난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시험에 떨어졌다고 말하다가 또 울었다. 수능이 끝났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수험생 생활이 그리 길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수능 점수가 나쁜 건 꼭 원하는 학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데, 임용고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합격과 불합격의 길만이 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불합격에 매여 있었다.


그 겨울,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험장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은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다. 어제 보던 자료가 잘 있는지 꺼내서 들여다보지만 사실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철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수험생들이 몇몇 보인다. 주말인데 출근 복장으로 서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들 힘들게 먹고사는구나 싶다가도 맞은편에 앉은, 한 손에 종이를 들고 머리까지 질끈 묶은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어느 시험장일까 궁금해진다.


아르바이트에서 겪은 힘든 일은 시험에 떨어진 허무함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나는 완전히 패배자가 됐고, 사회에서도 낙오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면 오후 1시쯤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삶이 이어졌다. 저녁 약속도 당연히 잡기 힘들었다. 내가 쉬는 낮에는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이라 아무리 즐겁게 놀고 싶어도 혼자 놀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 좀 신난다 싶으면 출근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더구나 일하는 총량이 같아도 오후에 일을 하는 건 체력적인 면에서 야근을 하는 것과 같다. 결국 학원에서 일하면 낮 시간을 온전히 활용하는 것도 아니고, 밤에도 편하게 쉬지 못한다. 10시에 수업이 끝나고 이런저런 뒷정리만 조금 해도 집에 가면 금방 12시가 됐다.

더는 시험을 볼 때마다 응원과 위로를 받는 것조차도 두렵고 힘들었다. 으레 겨울이 되면 나의 근황을 물어봐주고 이번에는 잘 될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매번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마저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나의 시계는 남들보다 느리게 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안에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며 경력을 쌓고, 괜찮은 회사에 정착해서 직급이 올라가는 과정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일 줄 알았다. 대학을 나와서 전공을 살려 일하는 사람이 적다고는 하지만, 나만은 전공과 관련이 깊은 정해진 길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인생은 언제나처럼 계획대로 흘러가주지 않았고, 나의 시계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른 지점에서부터 느려지기 시작했다.

더는 시험을 볼 의지가 없어져서 가족들의 걱정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내 이십대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중요한 시험에 작별을 고했다. 그래도 이미 주변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놀러가자고 할 때마가 거절해서 상처받은 사람들, 이직, 승진, 결혼 같은 좋은 소식이 있어도 나를 배려해서 알리지 않았던 사람들. 각자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무튼 시험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나의 곁에 끝까지 붙어있어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니가 성공해야 친구지. 이대로 무너지면 다들 너를 친구라고 생각 안 해."


시험에 붙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한 어머니의 한 마디는, 뼈아프게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에게 교훈을 남겼다.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던 나의 곁에 끝까지 남아있을 만한 인내심 강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다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책도 없이 오랫동안 걷던 길을 갑자기 그만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들은 계속 대기업에 취직하라고 종용했고, 내 입장에서는 대기업은 커녕 사기업에 지원하는 것조차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미 한참 전에 취직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주변에서 그렇게 다른 길도 알아보라고 했던 말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마음을 바꿔 먹고 조금씩 몰랐던 세계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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