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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Feb 12. 2021

참을 인 세 번이면 소비를 면한다

월급을 타기 전엔 사고 싶은 게 많다. 계획적으로 소비할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우선순위를 정한다.

사고 싶은 물건의 우선순위는 가장 비싼 것부터 비싸지 않은 것 순으로 정해진다.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물건이 있음을 알았기에 사고 싶어졌을 뿐.

문제는 막상 월급을 받고 나면 그 모든 소비가 아까워진다는 점이다.


얼마 전부터 너무나 갖고 싶은 가방이 있었다.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는 가격대의 가방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자꾸만 그 가방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통장 잔고를 보고 한숨을 쉬기를 몇 번. 최저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며 점점 소비를 향한 욕구를 키웠다. 비싼 가방 한번 산다고 인생이 뒤집히는 것도 아닌데, 오랜 고민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이 가격이면 다른 걸 몇 개 더 살 수 있는데. 혹은 이 가격이면 얼마를 더 모아서 통장 잔고를 이런 금액으로 만들 수 있는데. 이렇게 당장 실현하지도 않을 고민 때문에 소비를 한 번 참을 수 있었다.


월급을 받기 하루 전.

회사에서 내가 갖고 싶은 가방을 든 직원과 마주쳤다. 이건 운명이다 싶었다. 애써 관심 없는 척하며 곁눈질로 그 사람이 든 가방을 스캔했다. 대화를 하는데도 가방만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이만하면 들고 다니기에 딱 적당하고, 수납도 잘 되고, 이 정도 색이면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제 오늘만 견디면 이 긴 고민과도 안녕이다 싶었던 그 때. 결정적인 흠을 발견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퍼’가 없었다. 이럴 수가.


그 동안 그렇게 많이 가방 구매 후기를 찾아 봤는데 맹세코 한 번도 지퍼가 없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없었다. 내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어쩜 이렇게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거지. 지퍼가 없다는 사실에 가방을 사겠다는 열망이 뜨거운 물에 빠진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가방 구매 후기를 검색했다. 역시나 어떤 사진을 보아도 가방에 지퍼는 없었다. 가방에 꼭 지퍼를 채워야 안심이 되는 나는, 결국 소비를 포기했다. 어쩌면 생에 처음 거금을 들여 가방을 사려던 자아가 무의식중에 가방을 사면 안 될 좋은 핑계를 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퍼가 없다는 사실 덕분에 두 번째로 소비를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월급도 받았겠다, 통장 잔고도 여유로워졌고. 지난 한 달이 유난히 힘들게 느껴지면서 고생한 나를 위한 보상은 도대체 무엇으로 해 줄 수 있나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하도 고민을 하고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더니 주변에서는 그만큼 고민했으면 그냥 하나 사라고 부채질까지 한다. 월급을 받은 지 일주일이 넘도록 나는 가방 하나를 살지말지 결정하지 못했다. 비록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열심히 맛있는 것을 사 먹고, 어디에도 쓸 일이 없이 귀엽기만 한 피규어를 사는 데에는 고민 없이 돈을 써 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가방을 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 가방 하나를 살 가격이 그보다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카페에서 음료를 100잔도 넘게 시킬 수 있는, 바뀔 계절에 입을 옷 몇 벌쯤 장만할 수 있는, 미용실로 달려가 생명을 다해 가는 머릿결을 살릴 수 있는 그 금액을. 일단 나는 고스란히 미래의 내가 빼내서 쓸 수 없도록 목돈 통장에 묶어 버렸다.


세 번을 참은 끝에 결국 쓸 데 없는 소비를 막을 수 있었다. 집에 가방은 차고 넘치게 많다. 일주일 내내 다른 가방을 들어도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는데. 고작 브랜드 하나, 모양 하나 다른 가방이 뭐 대수라고. 몇 개월 지나고 나면 생각도 나지 않을 그 가방에 대한 열망을 드디어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또다시 다음 월급날은 다가올 테고, 나는 또 새롭게 사고 싶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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