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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Oct 15. 2021

한국인은 홍콩에서 미국 여자를 찾지

서른이 넘어서 처음 해외여행을 갔다. 신중하게 고른 첫 여행지는 홍콩이었다. 새벽 네 시의 홍콩 공항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공항 근처에서 숙소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류장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어서 한참을 헤맸다. 게다가 홍콩의 5월 날씨는 새벽에도 습하고 더웠다. 폐를 가득 메운 더운 공기에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야간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깜박이는 거리가 보였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거리를 보니 영화 ‘화양연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언덕 끝에 있는 숙소까지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두어 시간 후면 해가 뜰 시각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짐만 풀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서는데, 홍콩은 아침 공기조차 더웠다. 여름옷을 챙겨가긴 했지만 그마저도 전부 벗어 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숙소를 나와 지하철역까지 잠깐 걷는 사이에 티셔츠가 흠뻑 젖었다. 양산으로 해를 가리고 부채질을 해 봐도 소용없었다. 문득 지나가는 사람들의 패션을 보니 누가 봐도 나만 이방인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들은 거의 웃통을 벗고 있었다. 여자들도 끈 나시에 핫팬츠를 입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 틈에서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나는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라는 건 이런 걸까. 한국에서는 날이 조금만 더워져도 카페에 하루종일 죽치고 있었는데. 외국에 오니 이런 더위조차 신기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잠깐, 밖에 있으면 찜기 속 만두가 된 것 같고 건물 안에 들어가면 꽁꽁 언 채 냉동실에 처박힌 아이스크림이 된 기분이었다. 홍콩 여행 내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점점 정신을 반쯤 놓고 다녔다.

 시티 투어를 하고, 빅토리아 파크의 트램도 탔다가 쇼핑몰에서도 무언가를 잔뜩 샀다. 다리가 퉁퉁 부었는데도 멈출 수 없었다. 첫 해외여행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여행 내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홍콩 여행 쇼핑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막상 가서는 목록에 없던 것들을 더 많이 산 기억이 난다. 부채질을 하고 시원한 음료를 먹어도 해소되지 않는 더위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같이 간 친구에게 도대체 홍콩 사람들은 이 빌어먹을 섬나라에서 탈출할 생각을 왜 안 하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루종일 땡볕에서 걸으며 힘들었던 홍콩에서 기억을 미화시켜 준 건 대관람차였다. 홍콩의 더위에 거의 적응할 때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다가 대관람차를 발견했다. 빅토리아 하버를 바라보며 길게 늘어선 대관람차 대기줄은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딱 좋았다. 무작정 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대관람차를 향해 돌진했다. 손에 든 짐도 무겁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 같았지만 이것만큼은 무조건 타야 할 것 같았다.

 영국의 런던아이와 오다이바의 대관람차만 알던 나는 빅토리아 하버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대관람차를 보며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워서 못 타겠다는 아이를 달래는 부모, 왁자지껄 사진을 찍는 학생 무리, 손을 꼭 잡은 커플 그리고 식지 않은 땀을 닦으며 기대감에 부푼 나. 이 모든 게 영화 같았다. 대관람차 티켓 부스에서 틀어 준 음악도 기억을 미화하는 데 한몫했다. 가수의 목소리가 너무 멋있어서 이 음악을 꼭 알아내고 싶었다. 주변이 시끄럽고 인터넷 연결이 자꾸 끊겨서 음악을 검색할 수 없었다.

 대관람차를 다 타고 내려와서도 음악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어떻게든 이 노래를 알아내고 싶어서 메모장에 한글로 대충 가사를 적었다. 한국에 와서도 계속 생각나 찾아보니, ‘찰리 푸스의 LA girls’라는 곡이었다. 한국인인 내가 홍콩에 와서 LA에서 여자를 찾는 노래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가슴께가 근질거렸다. 찰리 푸스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 다른 곡들도 전부 찾아 들었다. 한동안 찰리 푸스와 함께한 홍콩을 떠올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홍콩 여행에서 돌아온 지 반년도 넘은 어느 날, 연남동에서 좋아하는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같은 노래를 또 듣게 됐다. ‘홍콩뽕’이 사그라들던 때였다. 하지만 식당에서 LA girls를 듣자마자 나는 그날 홍콩의 밤으로 돌아갔다. 여행 내내 더워서 짜증이 나던 건 이미 기억에서 지워졌다.

 특별한 날을 떠올릴 때 듣는 노래 리스트에 한 곡이 더 추가됐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이던 날, 대학 때 축제에서 꽐라가 되던 날, 불편한 자리에 억지로 끌려나갔다가 우연히 기분 좋은 일이 생겼던 날 듣던 노래들을 쌓아둔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었다. 이제 홍콩에 가고 싶어질 때면 찰리 푸스의 LA girls를 들어야 한다. LA girls에 묶어둔 설렘 덕분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오늘의 나는 다시 안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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