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해 보는 삶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내추럴>アンナチュラル은 일본의 ‘TBS’에서 방영한 드라마입니다. 법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부자연사 규명 연구소 ‘UDI라보’Unnatural Death Investigation Laboratory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법의학은 쉽게 말하면 ‘부검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의학 드라마이지만 법의학을 다루기 때문에 미스터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시작은 여느 일본 드라마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하나하나 전개될수록 저는 빠져들었고, 에피소드에 따라 울기도 웃기도 했습니다. 10화를 모두 다 봤을 때는 한동안 드라마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언내추럴>은 제 인생작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이야기 전개가 훌륭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속에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와 삶에 대한 철학, 죽음 가까이에서 피어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UDI라보의 소장 카미쿠라 야스오 역을 맡은 ‘마츠시게 유타카’는 극 중 이런 말을 합니다.
“일본에서는 ‘Unnatural Death’ 즉, 부자연사의 80% 이상을 부검하지 않은 채 적당한 사인을 붙여서 화장하고 있어요. 이건 선진국 중에서 최악의 수준이죠.”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대한법의학회지’에서 발표한 ‘2016년도 법의부검에 대한 통계적 고찰’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전체 사망자 중 부검률 3.0%, 변사자 중 부검률 22.3%로 우리나라의 상황도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내추럴>에서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피의자로 몰리고, 타살이 자살로 귀결되는 등 죽음 후에도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나옵니다. 다행히 드라마 속에서는 부검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여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는 상황을 막아냅니다.
이는 단순히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변사자 부검률이 22.3%밖에 안 되는 현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피해자가 있을까요. 누군가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우리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부검이란 것에 거부감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시신을 해부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선, 부자연스러운 죽음에 대해 부검을 하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검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언내추럴>을 보다 보면 ‘꼭 죽어야만 했을까?’, ‘왜 하필 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나쁜 놈들은 오래 살고,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불합리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분통이 터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죽음에는 이유가 없다.
아무리 많은 생명을 구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라고 죽음은 피해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끝내 죽음은 찾아옵니다. 죽음은 이유 없이 찾아옵니다. 죽음 앞에서 “대체 왜?”라고 물어도 죽음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저 숨을 거두어갈 뿐입니다.
우리는 필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죽을 수도,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우리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이유 없이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언내추럴>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입체적이라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선인과 악인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완전한 선인이나, 완전한 악인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선한 면과 악한 면 모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내추럴>은 주사위 같은 인간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살인과 관련된 사건에는 피해자와 피의자가 존재합니다. 대체로 드라마에서 피의자는 미움받는 존재이지만, <언내추럴>에서는 맘 편히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일반적인 경우로 확장해서 해석하면 ‘환경에 따라 평범한 사람도 악마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가담항설>이라는 웹툰에서 ‘백매’라는 인물은 이런 말을 합니다. “진심도 변합니다. 상황이 진심을 압도합니다.” <언내추럴>에 나오는 피의자는 대부분 자신의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계기는 악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 및 환경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사람이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도 환경에 떠밀려 범죄자가 되곤 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내추럴>에서는 많은 죽음을 다룹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더욱 안쓰러운 건 남겨진 사람들입니다.
드라마 내에서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들은 “왜 하필?”이라는 의문과 함께, 자신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까지 느끼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 앞에 어찌 이성이 힘을 쓸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죽은 이를 따라가고자 하며, 누군가는 복수를 다짐하기도 합니다.
<언내추럴>은 그런 인물들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언내추럴>의 답은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은 사람의 몫까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이왕이면 더욱 잘 살아가는 것.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좋은 이야기를 만날 때면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가상의 상황에 몰입하고, 다양한 인물, 다양한 상황을 만나며,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심과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tvN에서 방영한 <비밀의 숲> 이후 정말 좋은 드라마를 만났습니다. 인물들이 입체적인 점, 단순 소비되는 인물이 적은 점, 성에 대한 차별이 없는 점,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 등 <언내추럴>은 명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중간중간 흘러나오는 OST는 드라마를 더욱 빛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언내추럴>을 보고 난 후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훌륭한 이야기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