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싱가포르 한달살이-
취미 부자 엄마는 알아서 할 일 찾아서 지낼 테니 걱정 마
싱가포르에 오기 전 엄마한테 두서방도 나도 평일에는 일을 하는데, 엄마 혼자 어떻게 시간을 보낼 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엄마도 바빠~ 중국어 공부도 해야 하고, 그림도 그려야 하고, 수영도 해야 하고, 엄마는 알아서 할 일 찾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대답하셨다. 그렇다. 우리 엄마는 취미 부자라서 누구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시는 사람이다. 걱정과 달리 싱가포르에 와서도 그간 해온 취미생활을 잘 이어나가셨다.
엄마는 그림을 그리신다. 어린 시절 엄마는 할머니에게 미술학원에 등록해달라고 졸랐지만 할머니는 이미 피아노도 배우고 있는데 미술까지 배우면 다른 형제자매들은 어떡하냐며 둘 중 하나만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결국 미술을 포기하셨다. 몇십년이 지난 후 피아노 선생님으로서 은퇴를 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그림에 대한 꿈을 다시 꺼내셨다.
수채화를 주로 그리시는 엄마는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비워진 방 하나를 그림방으로 만드실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넘치시다. 그런 엄마가 그림도 장비빨이라며, 사용하시는 화구들을 싱가포르에 가져갈 수 없어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래서 싱가포르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외제' 화구로 싹 새로 사드린다고 약속하며 엄마를 달랬다. 그런데 막상 화구방에 도착하니 엄마는 계속 한국 가격과 비교하면서 너무 비싸다며 고르시질 못하셨다. 결국 고르고 골라 딱 필요한 색이 있는 수채화 페인트 세트와 붓 3개를 선택하셔서, 싹 새로 사드린다는 나의 약속이 무색해졌다.
엄마는 나의 선물에 보답이라도 하시듯 한 달 동안 싱가포르에 머물면서 일주일에 작품 한 개를 그리시는 엄청난 다작을 하셨다. 첫 작품을 보고 두서방이 비슷한 느낌의 그림으로 4개를 벽에 걸면 너무 이쁠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계획에 없던 다작을 하신 것이다.
엄마가 싱가포르에 와서 가장 좋아하셨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콘도 내 수영장을 무료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도 일주일에 3,4번은 수영장을 가셨다. 이른 아침 마을버스를 타고 인근 실내 수영장으로 가셔서 그룹으로 수영을 하셨는데, 여기서는 말 그대로 발 밑에 수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 좋아하셨다. 집에서 수영복을 입고 큰 수건 하나 허리에 둘러맨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수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싱가포르에 와서도 일주일에 3,4번씩 아침이든 저녁이든 수영장에 다녀오셨고, 수영장에서 눈인사를 할 이웃사촌까지 생기셨다.
취미 생활은 아니지만 엄마는 오랫동안 외국어 공부를 하고 계신다. 외국인 며느리와 사위를 맞이하면서 엄마가 본격적으로 외국어 공부에 더 매진하시기 시작하셨다. 나중에 손주들을 만났을 때 손주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시며 몇 년째 중국어와 영어 공부를 하고 계신다. 조카 은찬이가 4살 때쯤, 할머니인 엄마와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새언니를 쳐다보더니 중국어로 "엄마 할머니가 무슨 말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라고 하자, 엄마에겐 그게 꽤나 충격이셨던 것 모양이다. 그런데 올해로 만 7살이 된 은찬이가 한국어로 엄마랑 곧잘 대화하는 걸 보면,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몇 년째 주민센터나 동네 학원에 가서 외국어 수업을 들으셨지만 코로나 덕분에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수업도 보편화됐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도 온라인으로 중국어 수업을 들으실 수 있으셨다.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 안경을 끼고 중국어 교재까지 펼쳐놓고 노트북을 세팅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엄마의 학구열은 컴퓨터 장벽도 넘게 하는구나 감탄을 했다. 인터넷 뱅킹도 배워놓고 하는 법을 까먹으신 분이 줌 수업이라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공부도 하신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완화되면서 영어 수업은 온라인 수업이 개설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가학습이 가능한 외국어 공부 앱 듀오링고를 가르쳐드리니, 너무 좋아하셨다. 수시로 짬날 때마다 공부하셨고, 아침저녁으로 매일 2,3시간씩 영어 공부를 하셨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엄마한테 "이러다 수능 보고 대학 들어가겠어, 엄마! 좀 쉬어!"하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취미생활을 이어가는데 숨은 일등공신이 있다. 마라톤을 뛸 때 옆에 페이스메이커가 있듯이 엄마 곁에는 고양이 손주 루나가 있었다. 루나는 할머니가 그림을 그릴 때나 중국어 줌 수업을 할 때나 항상 쪼르르 달려가 할머니가 하는 것을 지켜본다.
중국어 줌 수업 때, 자꾸 화면 앞으로 등장하는 루나 덕분에 학생들은 마오 '고양이(貓)'와 신쟈포 '싱가포르(新加坡)'라는 새로운 단어를 배웠다.
그림을 그리실 때는 루나가 자꾸만 떠놓은 물을 만지고 마시려 든다며 루나를 혼내시면서도 곁에서 노는 루나가 귀여운지 그림 그리는 중간 틈틈이 루나를 한 번씩 쓰다듬으셨다. 루나가 자꾸만 물감을 만지려는 모습을 보곤 아무래도 전생에 화가였나 보다 하면서 루나에게 그림을 가르쳐보란 말에 할 말을 잃었지만 전형적인 손주바보의 할머니 면모를 보여주셨다.
은퇴 후 공부, 운동과 취미생활을 이어가는 엄마를 보며 존경스러우면서 감사하다. 젊은 시절 일과 살림, 육아를 하시며 열심히 사셨던 만큼 60세가 넘으신 지금처럼 즐겁고 건강하게 노년생활을 이어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