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싱가포르 한달살이 -
Very interesting taste!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온 가족이 홍콩으로 이민을 갔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30년 넘게 해외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엄마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거주하셨을 정도로 오랜 해외생활을 하셨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나라의 요리를 드셔 보진 못하셨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생계를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사고 싶은 거 못 사며 살아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미식의 도시라고 불리는 홍콩에서 그토록 오래 사셨으면서도 이번 싱가포르 한달살이를 하며 맛본 나라 음식이 더 많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미식가는 아니지만, 다양한 음식, 새로운 음식들을 먹는 것을 즐기고 찾아먹으러 다니는 편이다. 기념일이면 꼭 근사한 곳에 가서 식사를 하며 둘 만의 데이트를 꼭 즐긴다. 음식을 맛볼 때면 항상 맛을 분석하기를 좋아하는데, "이건 어떤 향신료 맛이 난다", "저건 이 재료를 이런 식으로 조리한 것 같은데 독특하다", "이 맛은 처음 맛보는 맛인데 새롭다", "이 메뉴는 너무 맛있는데 뭘 넣어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반면 엄마는 입이 짧고 맛있는 맛있는 음식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대충 허기를 때울 수 있는 음식을 찾아서 드시는 편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멀리까지 가거나 남이 밥 먹는 먹방을 본다는 것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편이다.
장모님의 입 짧은 사정을 몰랐던 두서방은 하루는 '장모님은 오늘 음식이 맛이 없으셨나 봐?"라고 물었다. 장모님이 많이 드시지도 않는 데다 음식 맛이 어떤지 별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으니 입맛에 안 맞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엄마에게도 맛 평가를 부탁드렸고, 엄마도 적극적으로 우리 부부의 맛 토론에 합류하셨다. 이때부터 엄마는 문제에 봉착했다. 음식이 비싸다고, 처음 먹어본다고 해서 다 새롭고 맛있는 것이 아닌데, 간혹 진짜 엄마 입맛에 안 맞는 음식들이 있었다. 맛을 평가는 해야 하는데, 대놓고 “Bad”라도 맛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대접받는 엄마 입장에서 미안하니, 뭐라 말을 할지 고민을 하셨다. 그래서 엄마에게 마법의 표현 "Very interesting taste!"를 알려드렸다. 흥미로운 맛. 맛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지만 새롭고, 흥미로운 맛! 입맛에 안 맞는 음식도 사위 기분 안 상하게 맛 평가를 할 수 있는 무적의 단어다.
싱가포르에 왔으니 빠질 수 없는 퀴진(cuisine)은 역시 페라나칸이다. 페라나칸은 중국과 말레이시아의 혼합된 문화를 말하는데, 여기서 파생된 음식이 바로 페라나칸 퀴진이다. 중국에서 오래 살아서 중국 음식은 다양하게 먹어본 엄마에게는 페라나칸 퀴진은 중국 음식 같으면서도 또 동남아적인 요소들이 많아 익숙한 듯 독특하다고 한다. 엄마는 특히 포피아(Popiah)는 전병 같은 피에 여러 야채와 소스를 말아서 먹는데 월남쌈 같으면서도 베이징 덕 같기도 해 익숙한 느낌이지만, 포피아에 넣어먹는 잘게 썬 야채와 고기를 썬 소의 향이 독특하다고 했다. 여기에 코코넛 밀크와 동남아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인도네시아식 고기찜 비프 렌당(Beef Rendang)은 우리나라의 갈비찜 같다며 맛있어하셨다.
엄마가 가장 신기해하신 음식은 그리스 퀴진이었다. 식당에 가기 전, 지중해식 요리라고 설명드리니, 지중해식이란 말은 들어는 봤지만 먹어본 적은 없어 무슨 음식일지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대표적인 그리스 요리로 이것저것 주문하니, 입 짧은 엄마는 너무 많다 하시면서 하나하나 맛을 보며 신기해하셨다. 그리스 요리하면 역시 문어가 빠질 수 없는데,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시지만 딱딱하고 질기다해서 한동안 문어를 드시지 않았다. 문어요리를 주문하는 날 보곤 손사래 치던 엄마는 문어 한 점을 드시고는 그동안 문어가 이렇게 부드러운 줄 몰랐다면서 감탄을 하셨다. 문어도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것을 몇십 년 만에 깨달으셨다.
목포 출신인 엄마는 해산물을 엄청 좋아하신다. 그런 엄마의 입맛을 물려받았는지 나 또한 해산물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남편은 육류파라 해산물을 잘 먹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위한 외식을 할 때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굴 석화를 먹으러 가는데, 엄마를 단골집으로 모셨다. 여름에는 날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며 또 손사래를 치시던 엄마에게 "싱가포르는 365일 더운데 여기 사람들은 그럼 평생 회도 먹으면 안 되겠네?"라고 맞받아쳤고, 내 성에 못 이겨 결국 굴을 먹으러 갔다. 굴이라고는 항상 전이나 국으로 드셨던 엄마는 굴 석화는 자주 먹었던 음식은 아니었지만 딸과 사위 따라 호강한다며 맛있게 드셨다. 결국 해산물파 엄마와 내가 18개를 나눠서 다 해치웠다.
마침 엄마가 싱가포르에 머무는 기간에는 엄마 생신, 내 생일 그리고 남편 생일이 있었다. 기념일이면 항상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데 결혼 후, 아니 독립해서 산 이후 엄마와 처음 내 생일 함께 보내게 되었다. 올해는 특별하게 프랑스 레스토랑에 방문했다. 처음 보는 식재료 조리법, 맛에 우리 모두 신기해하며 먹었는데 엄마는 본인 입맛이 영 맞지 않으신지 맘껏 드시진 않으셨다. 특별히 아내 생일이라고 장모까지 모셔 좋은 곳으로 왔는데, 괜히 음식 투정해서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셨는지 맛 평가를 하길 조심스러워하셨다. 맛이 없다는 말을 영어로 아는 단어라고는 "Bad" 나 "Not Tasty" 밖에 없는 실례가 될까 에둘러 말씀하시길래, 마법의 단어 "Interest taste"를 가르쳐드렸다. 이후 이 단어를 아주 잘 사용하시게 됐다. 처음 먹어본 흥미로운 맛이지만 결코 맛있다고는 안 했다!
싱가포르에 왔으니 칠리 크랩을 안 먹어볼 순 없다. 평소 종종 갔던 뷰 좋은 시내 쪽에서 칠리크랩을 먹으러 갔다. 아무래도 중식의 맛이 있다 보니 엄마는 싱가포르에서 먹은 음식 중 손꼽히는 곳 중 하나라고 아직도 칭찬을 하신다. 아무래도 아는 맛이 무섭다고 익숙한 중국 음식의 맛과 향이 더 맛있게 느끼신 듯하다.
"이 프레첼은 독일 관광지에서 먹던 식어빠진 그 프레첼과 다르다."
독일 레스토랑에 가서 먹은 따끈따끈한 프레첼을 드시곤 던진 첫 마디셨다. 6년 전 엄마와 함께 떠난 유럽 여행 중, 독일 관광지에서 식어빠진 프레첼을 사 먹었는데, 너무 딱딱하고 질겨서 세상 그렇게 맛없는 프레첼은 처음이었다. 엄마 인생에서 첫 프레첼이 이렇게 맛이 없었는데 6년 만에 다시 먹어본 독일 음식들은 유럽 여행 추억 때문인지, 실제로 맛이 훌륭해서인지, 아님 둘 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싱가포르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으뜸인 것을 골라보라 하면 엄마는 어김없이 에그슬럿(Eggslut)이라고 말하신다. 엄만 싱가포르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또 에그슬럿이 먹고 싶다고 할 정도로 너무 맛있게 드셨다. 폭신한 빵과 계란이 건강하게 느껴지고 질리지 않는 맛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에그슬럿이 있는데, 이렇게 맛있게 드신 음식을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아마 입 짧은 엄마는 혼자나 지인분들과 강남까지 가서 에그슬럿을 먹을 생각을 안 하실 테니, 언제 한국을 가게 되면 엄마와 같이 에그슬럿을 먹으러 가야 할 것 같다.
이외에도 사테에 가자미 구이, 양고기 스테이크, 똠양궁, 빠에야, 일식 카레, 파테에 빵, Cold cut meat 등등 엄마가 그동안 먹어보지 못하셨던 음식들을 맛보셨다. 나라를 세보면 싱가포르, 중국, 스페인, 태국, 프랑스, 독일, 일본, 그리스, 이탈리아, 미국 등등 10개국 이상을 혀로 여행을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한 달 동안 이렇게 다양하게 먹게 될 줄 몰랐고, 처음 맛보는 맛과 향신료,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 모든 것이 처음이셨다고 말하셨다. 우리의 먹방 로드는 항상 엄마의 "신기하다", "맛있다", "독특하다", "처음 먹어본 맛이다"라는 말로 가득했고, 이런 반응이 듣기 좋고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엄마와 새로운 음식을 먹으러 다녔다. 육십이 넘으신 엄마에게는 여전히 새로운 음식과 맛이 많고, 새로운 세상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드리고 그것을 함께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