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영 May 12. 2023

19. 내가 만난 100인

잔인했던 그녀의 안부

"저 통기타 동호회에서 만난 40대 유부남과 바람 나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돈 좀 빌려주세요."


아주 평범했던 일요일 아침에 뜬금없이 날아온 문자였다. 발신인은 H언니였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계정해킹으로 인한 스팸 문자임을 확신했다. 곧바로 H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H가 아닌 H의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H언니 전화기 아닌가요?"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아~~ 그게... 스팸문자가 와서요."

"그거 스팸문자 아닙니다. 제가 보낸 문자입니다."

"네? 아니,... 왜?"

"문자 내용은 사실 그대이고요. H가 핸드폰까지 두고 야반도주를 했거든요. 분명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릴 거예요. 카드값도 못 막을 정도로 완전 빈털터리거든요."


하루가 멍함으로 채워지는 날이었다.


H언니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때였다. 뽀얗고 깨끗한 피부에 항상 예쁘게 입고 다녀 부잣집 딸처럼 보였다. 성격도 아주 밝아서 친해지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하는 사람이었다. 우연히 앞뒤로 앉아 회화수업을 듣다 가까워졌는데 우리는 아주 잘 맞았다. 그 이후 H언니와 나를 중심으로 한 무리의 친구들이 만들 졌고, 우린 낚시터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자취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방학 때 우리 집으로 와 오징어 튀김을 만들어 먹었고, 놀이동산이나 워터파크등 2년 동안 무리 지어 놀았다.

2년이 지나면서 남자친구들이 군대를 가거나 또 우리는 유학을 가는 등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꾸준히 틈틈이 만남은 이어갔다.

하지만 가끔 만나는 H언니의 모습은 여전히 밝기는 했지만 빠르고 강하게 변해갔다.


"담배 한 대 펴도 돼?"

"언니 담배 펴요?"


그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자신의 속마음을 길게 내뿜었다.

"내가 왜 대학을 늦게 온 지 알아? 내가 왜 장학금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는지 알아?"

"아르바이트하고 놀았다면서요?"

"나 사실 수원에 있는 삼성공장에서 일했어. 생산직에 기숙사 생활을 했어. 2년 동안... 대학을 바로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택시기사였고,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시는 가정 형편이었어. 차마 내가 대학 가고 싶다는 말조차 못 꺼낼 정도로... 그저 너희들처럼 평범한 대학생이 되고 싶었는데... "


몇 년을 그녀와 함께 했지만 그녀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러운 건 처음이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로 따져 봤을 땐  담배를 피우는 건 그녀였지만 그녀의 고백 앞에서는 내가 더 나쁜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녀가 시험기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숨어버렸리고 놀 때만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 왜 그렇게 교수님과 친해지려 노력을 했는지.., 그녀의 치열했던 삶자체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감히 나 따위가 말이다. 좋은 부모 만나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되고, 매달 용돈도 넉넉히 받는 나 따위가 말이다.


학기 중 그녀와 모교수의 스캔들이 터진 적이 있었다. 우리 무리는 그 스캔들을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쩌면 사실이 아닐까? 라며 수긍이 되기도 한다. 학과의 어떤 아이가 우연히 A교수방을 찾았는데 당시 H언니가 교수와 나란히 앉아 채점을 도와주고 있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서는 빨강펜과 함께 지우개와 연필이 함께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험지의 주인이 바로 H언니였다고 한다. 원래도 공부를 잘했던 H언니가 그 과목에 A+를 받으면서 그 목격담이 신호탄이 되어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본인 시험지를 자신이 채점한다고? 그 옆에 연필과 지우개는 뭐야?"

"OO이가 그러던데... H와 A교수가 아침에 모텔에서 나오는 것도 봤다던데?"

"둘이 그렇게 그런 사이라던데?"


하지만 우리 무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 진실의 결말은 몇 년이 지나서야 그리고 우리의 순진함이 조금 벗겨진 뒤에서야 밝혀졌다. 그날도 H언니가 기분에 취했는지, 추억에 취했는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A교수님도 너희들 보고 싶어 하시던데 지금 나오라고 할까? 한번 볼래?"



H언니는 만날 때마다 성큼성큼 변해가고 있었다.

"나 이제 담배 끊었어. 그리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어떤 사람이에요?"

"아주 평범한 사람. 너희도 잘 알잖아. 우리 집은 늘 시끄러웠는데  이 남자집은 진짜 집 같아. 아주 평온해. 부모님들도 조문조문 말씀하시고 우리 집처럼 절대 화를 내며 말하지 않아."

"잘됐네요. 언니! 축하해요. 그동안 언니 고생도 많이 했는데.. 진짜 축하해요."

"나 모아 놓은 돈도 하나 없는데... 이 남자가 자기 카드로 가전제품까지 사서 내가 해 온 혼수처럼 해주겠데... 정말 착한 남자야."



결혼 후 만난 H언니는 조금씩 아줌마로 변해있었다.

웃음소리도 크고 이쁜 것보다 편한 것을 더 좋아했다.

"가정주부로 사니까 어때요?"

"좋아! 요리하는 것도, 조용한 내 집이 있는 것도. 아주 아주 행복해."




끝까지 그 행복을 갖지 못한 자.

다시 만난다 해도 쉽게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자.


그대, 지금은 잘 지내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18. 내가 만난 100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