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동네 어르신들에게 주민센터나 은행만큼 좋은 쉼터는 없다.
그날도 은행에는 업무를 보러 온 사람보다 피서를 떠나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에 비해 대기 인원이 고작 3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은행에 볼일을 보러 온 나는 앉을자리가 없어 한쪽 귀퉁이에 쭈뼛 서 있어야만 했다.
대기인원 2명
그 사이에 벌써 한 명의 대기인원이 줄었고 차례를 기다리며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때 내 앞의 손님과 은행직원 사이의 대화가 아주 크게 들렸다. 덕분에 나를 향해 있던 몇몇의 시선들이 몽땅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정되기 시작했다. 손님인 할아버지는 귀에 보청기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현재 통장잔고는 850원뿐이에요."
"아닐 텐데... 2천 원이 더 있을 텐데..?"
"할아버지 엊그제 3천 원을 찾아가셨고, 어제 2천 원을 마저 찾아가셨네요."
"그래?.. 그럼 돈이 없어?"
그때 은행에서 850만 원도 아니고 850원을, 3천만 원도 아니고 3천 원을 취급하는걸 처음 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보청기 때문에 잘 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돈이 없다는 현실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직원에게 다시 되물었다.
"그럼 돈이 얼마 있어?"
"850원 있습니다. "
<띵동>
32번 고객님!
바로 그의 옆자리에서 내 순번이 불려졌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몰려있는 무안함보다는 한 가닥의 희망마저 무너진 잔인함에 오히려 더 쓸쓸해 보였다.
그가 찾고자 했던 돈은 2000원이었다. 과연 그가 2000원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애써 시선을 돌린 채 내 볼일을 보았다.
모든 볼일 마치고 돌아설 때 먼발치 소파에서 이제 막 일어나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한 밤의 지친 그림자처럼 길고 느리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더운데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 드세요."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선뜻 낯선 이의 돈을 받지 않았다.
아주 잠시 깊이 파인 그의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통장에 돈이 없대. 나는 돈이 없어."
그때 크게 한숨을 내쉬던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났고 나는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길 위에 서 있었다.
예산이 어긋난 자.
예상이 어긋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