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삐날~팜플로나(Pamplona)
대점프를 먼저 제안한 것은 제이였다. 전날 밤 마른 살라미를 씹으며 흑화한 제이는 우선 대도시로 이동해서 잠깐 작전 타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나는 즉시 찬성했다. 계획이 어긋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다. 예상치 못했던 숙박 전쟁은 정신을 상당히 피로하게 했다. 그리고 아킬레스건이 문제였다. 1년 전,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동네 공원을 열심히 뛰었다. 내 몸은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대답했다. 그만해라. 딱 3일을 뛰었고, 4일째 되던 날 병원에 가서 반깁스를 하고 왔다. 아킬레스건은 피레네 산맥을 넘은 그날 밤, 바로 통증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게다가 넷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이 딱 붙어 있는 슬픈 발을 가진 탓에, 딱 하루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퉁퉁하게 자리 잡아서 걸을 때마다 고통을 유발했다.
물집은 제이의 발도 피해 가지 않았다. 제이는 트레킹화를 신으라는 내 은근하지만 집요한 잔소리를 가뿐히 무시하고 트레킹 샌들을 신었다. 그러니까 물집이 생기지,라고 말하고 싶은 심술이 차올랐지만, 비브람창에 푹신한 쿠션을 자랑하는 트레킹화를 신은 내 발에도 물집이 생겨버려서 나는 그만 잔소리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샌들이냐 운동화냐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연약함이 문제였다. 나는 하루에 천 걸음을 채 걸을까 말까 하는 재택 프리랜서고 제이는 일주일에 두어 번 출퇴근길만 겨우 걷는, 연약한 IT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례길 이틀 차에 버스라는 문명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왕 치트키 쓰는 거 후하게 쓰기로 했다. 원래 일정이라면 이틀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를 한꺼번에 점프하기로 한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순례자들을 구경했다. 산신령이 쓸 것 같은 나무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 유아차를 밀면서 걷는 여자, 강아지와 함께 걷는 남자. 어째선지 나보다 객관적으로 걷기 어려운 조건을 가진 이들만 내 앞을 지나갔다. 머쓱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하나. 그 와중에 버스를 안 타겠다는 선택지는 없는 나 자신이 제법 치사했다.
버스에 올라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팜플로나 버스터미널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바퀴와 내연 기관은 이틀을 1시간 10분으로 단축시켰다. 이것은 마법이다. 탈것이라곤 가마와 말밖에 없는 시대에 그마저 이용할 돈과 신분이 없어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감격하고 말았다.
팜플로나는 생장 피드포트에서 출발한 후 처음 만나는 대도시다. 직업인이 잘 가꾼 티가 나는 공원, 사방 천지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익숙한 대도시의 풍경에 마음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