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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부 Jan 10. 2024

4~5일차. 운명적인 만남

팜플로나(Pamplona)

그를 처음 만난 곳은 팜플로나의 엘 꼬르떼 잉글레스 백화점 지하 1층이었다. 나는 쭈삣쭈삣 그에게 다가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영롱함이었다.


그는 동글동글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오렌지를 산만큼 머리에 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빈병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는 바로 오렌지 착즙 기계였다.


그의 정체


기계가 갓 짜낸 오렌지주스를 빈병에 직접 담아서 계산대로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다. 갓 짠 오렌지주스가 1리터에 3.49유로. 약 5천 원이 넘는 셈이다. 홀연 음식의 신으로부터 계시가 내려왔다. 저 기계로 짠 오렌지주스를 먹거라. 나는 충실하게 계시를 따랐다.


빈병을 놓고 레버를 당기면 오렌지들이 줄지어 내려오며 위잉 위잉 주스가 되었다. 황홀했다. 넘치기 직전까지 병을 채우고 뚜껑을 닫았다. 기계를 처음 사용해서 미숙한 탓에 오렌지 즙을 살짝 흘렸다. 오메 아까운 거. 그것까지 싹싹 핥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문명인의 모습은 아니다. 입맛을 다시며 끈적해진 손을 닦았다.


백화점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이가 목이 마르다며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또 마셨다. 콸콸콸 병이 비어갔다. 나는 그 옆에서 그만 먹어! 그만 먹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숙소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식혀서 먹겠다는 내 계획은 무너졌다. 지금 먹지 않으면 다 제이의 목구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었다. 제이의 손에서 주스병을 뺏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직감했다. 나는 그를 자주 만나게 되겠구나. 이건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내가 오렌지 주스를 짤 때만 해도 시큰둥했던 제이조차 흥분했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스페인 오렌지는 뭐가 좀 다른가?” 


나는 거만하게 대꾸했다. 


“거봐, 계시가 내려왔다니까.”


팜플로나의 이틀 차, 스포츠용품점에 가서 내 왼쪽 발목에 씌울 아킬레스건 보호대를 사고 나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이 도시에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가 있다기에 가기로 했다. 헤밍웨이 팬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유명한 곳을 안 가는 건 관광객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카페에 가서 헤밍웨이가 마셨다는 음료를 주문했더니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한 시간 있다가 오라고 했다. 됐다. 나는 그냥 오렌지주스나 먹을래. 우리는 또 그를 만나러 갔다. 레버에 맺힌 한 방울까지 아까워하며 주륵주륵 오렌지주스를 짰다.  그리고 또 콸콸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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