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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0

8. 타인의 시선

당신에겐 온통 자부심인 그일이 왜 내겐 아닌지

나 자신을 좋게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남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수치심에  슬퍼하고 있는 제인에게 헬렌이 다가와 위로를 건넨다. 브로클허스트 씨가 제인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이곳에서 그의 '말'을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고. 이곳에서 계속 잘 생활해 나간다면 사람들은 제인의 '행동'을 통해 너의 진가를 알아보게 될 거라고. 템플 선생 또한 제인에게 스스로 변명할 기회를 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제인은 그들에게 자신의 슬픈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해 신중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회복됨을 느낀다. 타인의 시선을 거두고 내 안에 집중하자 비로소 자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회사를 때려치고 집구석에 들어앉았다’는 표현을 썼을 때 불쾌해하던 친구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단톡 너머로도 다 느껴졌다. 그녀는 결혼 후 자발적으로 직장을 갖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이에게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매일 저녁 입에서 단내가 달 때까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낮에는 도서관과 놀이터를 오가며 온몸을 다해 놀아주었고, 우리 땅에서 건강하게 재배한 한OO 재료만 가지고 음식을 차렸다. 그녀에게 집안일이란 온통 자부심으로 빛나는 일이다. 그러니, 나의 이런 폄하는 곧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표현일 터.


오늘은 그 친구에게 답하려고 한다. 너에겐 눈부신 자부심인 그 일이 왜 내겐 아닌지. 왜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  


신혼 때부터 음식은 내 담당이었다. 남편은 내가 뭘 만들어도 ‘맛있다, 별로다, 뭐가 먹고 싶다’, 반응이 없었다. 남편의 음식 취향은 시댁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싱싱한 재료 자체의 미감을 그대로 살려, 되도록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을, 바로바로 해서 식탁에 올리는 걸 철칙으로 여기셨다. 생선이나 고기는 그대로 구워 먹고, 소금 이하 조미료는 최대한 배제한 상차림. 고기라면 간장에 잰 것을, 생선엔 무 넣고 고춧가루 넣어 지져 먹는 친정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다행히 음식 간을 못 맞출 정도의 곰손은 아니었던 지라, 신혼 때 남편의 묵묵부답에 대해선 늘 과묵한 사람이라 그런 거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맞벌이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이후에도 그의 음식 취향을 제대로 알아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모든 사이클과 리듬이 아이들 입맛에 맞춰 돌아가던 때이니. 남편은 곰국과 계란 프라이에 소금을 치지 않는다는 것, 마침 아이들 음식을 만들다 보니 그 궁합이 맞아떨어져 덩달아 간을 덜하게 됐다는 것 정도? 정작 그의 음식 취향과 묵묵부답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 건, 친정 엄마가 며칠 집에 다녀가셨던 그 날 이후다. 


나는 집에 어른이 오셔도 일부러 대청소를 한다거나 특별히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다. 별로 긴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맞벌이 때는 그럴 시간이 없었고, 외벌이가 되어 집안일에 좀 더 방점이 찍힌 후에도 나는 그 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괜히 냉장고를 들쑤시고, 이불빨래를 하고, 무슨 음식을 할까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오는 손님이 반갑지 않고, 내 맘 같지 않다고 남편이나 애들에게 괜히 없던 짜증도 부리게 되기 마련. 그렇게 먼지 한 톨 없이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맞느니, 너저분해도 반갑게 맞이하자는 일종의 신념 혹은 꼼수 같은 게 그때 생겼달까. 베개나 이불 정도만 빨아놓고는 그다음 건 되는대로 늘어져, 하면 하고 말면 말고 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반갑게 맞이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니까.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이런 마음의 태도는 의외의 선순환(?)으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한 때 전원주택에 꽂혀서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못할 일도 아닌 듯싶어 이렇게 제안드린 적이 있었다. “어머니, 요즘은 듀플렉스 트리플렉스가 유행이래요. 각자 땅 사고 집 지으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요. 돈 합쳐서 마당은 같이 공유하고, 대문은 따로 내서 같이 집 짓고 사는 거죠. 서로의 집은 아치 같은 걸로 연결해서요. 아이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저녁도 얻어먹고. 너무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요?” 했을 때, 어머니께서 조금의 여지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다. 


“나는 너랑은 못 산다.” 


아이들이 '이 집, 저 집'이 아니라 '당신의 집'으로만 부지런히 오르내릴 게 뻔히 보이셨던 걸까. 분명한 건, 단호한 거절이었다는 것.


그러니 이즈음 되면 친정 엄마쯤은 어떻게 대할지 뻔히 짐작이 갈 테지. 당연히 헐렁하다. 더러운 꼴은 또 못 보시는 친정 엄마는 우리 집 마루에 가방을 탁 내려놓자마자 청소부터 시작하신다. 며칠 딸 눈치를 봐가며 베란다며 냉장고가 하나 둘 털린다. 처음엔 제발 ‘남의 집’ 좀 건드리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애정 어린 감성 터치에 협박까지 해봤다. 씨알도 안 먹혔다. 그리고 어느 날. 친정 엄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제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심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의 집’ 밥 공짜로 얻어먹기 싫어 그러는 거니 가만 좀 냅둬라.”  


어른들은 왜 그렇지 않은가. 버려진 땅 한 평만 있어도 가만 두지 못한다. 갈아서 씨 뿌려야 한다. 널브러진 빨랫감은 빨아야 하고, 설거지는 쌓이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묵혀 두는 모든 건 죄악이다. 오랜만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도 꼭 마늘 한 양동이 까고 앉아야 맘이 편하다. 새마을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아무리 딸네 집이라도 해주는 밥 먹고 놀자니 불편하다는데, 몸을 놀리는 게 더 맘 편하시다는데, 내가 무슨 근거로 나 편하자고 그 일을 못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리하야 한 번씩 딸네 집에 머무르실 때마다 밥값을 꼭 하고 가고야 마시는데. (그러고 보니 서두가 너무 길어져버렸네;)


그날도 딸년은 친정엄마도 계시겠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부엌을 나와 보니 이미 친정 엄마는 전기밥통에 밥을 안치고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계셨다. 이윽고 식탁 위로 이것저것 출처도 유통기간도 불분명한 반찬들이 올려진다. 죄다 사위 먹이기엔 못마땅한, 의심스러운 반찬들이. 사위가 식탁에 앉자마자 친정 엄마가 죄인처럼 한 말씀을 건네신다. 


“아유, 우리 O서방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어쩌나. 장모라고 와서는 뭐 하나 제대로 해놓지도 않고.”


친정 엄마는 계속 안절부절못한 채 식탁 주위를 서성이고, 나는 속으로 ‘누가 엄마 보고 우리 집 와서 사위 아침상 차리랬수’ 하며 남편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풋, 하고 웃으며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떠서 밥에 올려놓더니 그대로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아침부터 이렇게 난리냐는, 딱 그런 표정을 하고는.  


그때 알았다. 

'아, 남편은 음식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러게. 밥 한 끼, 이게 뭐라고! 아침부터 두 여자는 종종거리며 상을 차리고, 안절부절을 못하고, 눈치를 보며 소란을 피웠나. 한 끼 그냥 때우면 그만인 이 하찮은 것을. 아침에 생선을 굽고 전을 부쳤어도 남편에게는 똑같았을 거다. 그에게 음식은 그냥 삼시세끼 오늘도 치러야  할 의식과 같은 거다. 그래서 그동안 음식 앞에서 아무런 감흥도 촌평도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 후로 음식 차림에 대한 내 태도도 확 바뀌었다. 내가 음식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던가. 요리하는 게 즐겁고, 상 차리는 게 보람찬 사람이던가? 아니다. 매 끼니마다 뭐 먹을지 고민하는 일에 질리고 질린 사람이다. 아이들도 이제 자랄 만큼 자랐고, 음식이라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각해 보니, 다이어트하지 못해 난리인 시대에, 가족 모두 아무도 가치를 두지 않는 이 일에 나 혼자 종종거릴 필요가 없었다. 전업맘 10년 차. 1년 365일. 하루 세끼면 그동안 1만 번이 넘는 식사를 차렸다. 외식도 하고 빵으로 때운 적도 있었을 테니 최소 하루 한 끼만 차렸다 해도 10년 간 3,650번의 식탁을 차렸다. 내가 똑같은 일을 3,650번이나 반복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제 좀 헐렁해져도 괜찮다. 한두 번 왕의 식탁을 차렸다면, 한 두 번쯤은 좀 가난한 이들의 식탁을 차린들 어떠랴. 딱 한 끼 분량의 재료만 모아놓은 밀키트를 사서 때우는 일에도 죄책감 갖지 말기로 했다. 나보다 훨씬 솜씨 좋은 전문가들이 가진 양념과 가장 싱싱한 재료를 엄선해 판매하는 노고를 우습게 여기지 말자. 매번 사서 반은 쓰고 반은 남아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소비라고 생각하자.


아무리 다짐해도 사람의 습관은 참 무서운 거다. 주부생활 5년 차쯤 됐을 때, 음식이 입에 착 달라붙기만 한다면 마법의 가루 좀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요리할 때 손이 가지 않았다. 맞벌이하던 시절, 처음으로 새벽에 아기 이유식을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매끼 다양한 식재료로 집에서 한 것보다 깔끔하게 제공하는 그것 한 번을 이용해 보자 하고 해보지 못했다. 우리 엄마 시대에 여자들은 음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었다. 남편과 똑같이 맞벌이하면서도 우리 엄마들은 집을 나서기 전 아이들과 시부모님 밥상을 다 차려놓고 자기 도시락까지 싸서 출근을 했다. 제사에 잔칫상은 또 얼마나 자주 돌아오는지. 그래도 다른 집 여자들도 다 하고, 더한 것도 하는 여자들이 많았기에 불평할 수 없었다. 그러며 딸들에게 말한다. 니들 때문에 참았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지만 정말,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게 살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을 깨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어쩌면 깨닫고 불평하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몸을 돌이켜 저항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남편에게 맞고 살던 여자들이 쉬이 남편을 떠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맞고 살던 남자들이 자기 아들을 때린다. 그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매 맞고 때리던 그 관성이 때론 중력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음식이라는 관성에서 벗어나 생각했다. 그리고 알았다. 가족 중 음식에 가치를 두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뿐이라는 걸. 나는 더 이상 그 궤도에 나를 맡겨두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한걸음 걸어 나와 보니 내 삶에 나 스스로 쳐놓은 족쇄들이 훨씬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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