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Oct 23. 2020

7. 남자들은 자꾸 가르치려 든다

 함께 침묵한 나도 공범

아, 학생들의 입에 탄 귀리죽이 아니라 빵과 치즈를 넣어 주다니,
선생은 미천한 육체는 먹였을지 모르나
불멸의 영혼은 굶주리게 했음을 생각하지 못한 거요!


브로클허스트가 로우드에 나타났다. 값비싼 비단과 모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비버 모자 아래 곱슬곱슬하게 머리를 말아 한껏 멋을 낸 그의 아내와 딸을 대동하고. 그리고 원생들 앞에서 훈계를 시작한다. 동상에 걸려 밤마다 통증을 참고, 한창 자랄 나이에 배를 곯아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 앞에서.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라고.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머리카락일랑 잘라버리라고. 제인은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석판으로 얼굴을 가리려다 오히려 발각되고, 재차 지적질을 당하며 의자 위에 서 있는 치욕적인 벌을 받는다.


맨스 플레인(mansplain).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다 아는 양 떠들어대는 이런 브로클허스트 같은 남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오랜 세월 남자들이 여자들을 바라보며 몸에 새긴, 여자는 남자보다 일단 더 모를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이 내포된 단어. 혹은 "나는 늘 옳다"고 생각하는 확신에 찬 남자들의 태도.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유모차를 고를 때였다. 내 나름 이런저런 맘 카페를 들락거리며 정보를 수집하고 쇼핑몰 후기참고가장 적당해 보이는 걸 주문했는데,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이 기분 나빠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내 말은 안 듣고, 맨날 남의 말만 듣냐?”


내가 자신이 추천한 유모차를 고르지 않고 다른 걸 골랐다는 거다. 그러미 나는 졸지에 '남의 말만 듣는 줏대 없는 여자'가 되고 말았다.


결혼하고 남편에게 운전 연수를 받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특히 차선 바꾸는 걸 어려워하자 남편은 자기가 "go"하고 신호를 보내면 바로 끼어들라고 했다. 지체하지 말고 무조건 머리를 들이밀라고. 하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 만으론 핸들을 꺾을 없었다. 눈으로 안전거리가 확보된 이후에야 손과 발이 움직였다. 그러니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고, 남편은 그때마다 왜 이렇게 자기를 못 믿느냐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남편의 의견을 무시한 게 아니다. 그의 의견을 다른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봤고, 비교 검토해서 가장 ‘내 생각’에 좋아 보이는 걸 ‘선택’ 했을 뿐이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 일에 투자하는 남자의 의견을, 하루 24시 아이를 돌보는 여자들의 의견보다 내가 더 신뢰해야 할 근거가 어디에 있나. 그를 못 믿은 것도 아니다. 누군가 하는 말을 무턱대고 받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머리에서 몸으로 내려오기까지, 나에게는 여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내가 꼭 자신의 의견에 찬성표를 던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 오만에 가까운 확신이 나는 더 이상했다.  

 

그는 이후에도 내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시할 때면, 늘 자기 의견이 무시된다며 기분 나빠했다. 그러다 보니 부부 사이에 뭔가 이견이 생겨 논쟁이 시작될 때면 몇 마디 오가기도 전에 "됐다, 고만 하자"로 자주 일단락되었다. 그건 "너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와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사이의 아주 이상한 언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때는 빈정부터 상해버렸던 터라 부부 사이에 소통의 언어가 자라지 못했다.    


연애할 때 나는 남편의 확신에 찬 모습이 참 좋았다. 그는 자기를 중심으로 지구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 앞에서도 당당했고, 주눅 들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나는 늘 지구 변방 끝에 서서 자전축에 끌려 다니는 사람. 남녀노소 막론하고 낯선 사람 앞에만 서면 목소리가 떨렸으며, 내가 아는 내용은 이미 남들도 다 알 거라 생각해서 손 들지 못했다. 늘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실패한 일이 그다지 많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늘 최악을 가정하며 살았을까. 최악만 아니면 돼. 돌이킬 수만 있으면 돼,라고. 나도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바닥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남편이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물었을 때에도 나는 반박하지 못했 거다.


"너는 왜 내가 잘 될 거라는 생각을 안 하냐?"


지금은 안다. 그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당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될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기대하면 혹 실망할까 봐. 그럼 내가 너무 낙담할까 봐. 불안을 대처하는 나만의 방식이라고. 불확실한 삶에 대해 내가 방어하는 일종의 물타기라고.


생각해보면 '최선'을 정의하는 방식도 우리는 참 달랐다. 교회 부부 모임에서 어느 날 "대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라고 내가 던진 화두에 남편이 이렇게 대답을 했던 거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여느 집 맞벌이 남편처럼 가사 일을 적극적으로 분담하지도, 여느 집 아빠처럼 아이랑 온몸으로 놀아줄 줄도 모르는 이 남자는... 대체 어느 별에서 홀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매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 숨이 꼴딱 넘어가는 판에. 다행히 나는 이해가 안가면 막 파고드는 성격이다. 이 질문 저 질문 끝에 실마리 하나를 물었는데 그건 바로 그와 내가 최선의 기준이 다르다는 거였다.


그의 기준은 늘 '자신'이고, 나의 기준은 늘 '남'이다. 그의 기준은 제 아버지 시대 때에 비하면 유모차를 밀고 아이 기저귀라도 한번씩 가는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나의 기준은 맞벌이 부부라면 남편도 아내와 동등하게 빨래도 청소도 설거지도 나눠서 하는 옆집 남자다. 뭐야, 그러고 보니 나는 줏대 없이 맨날 옆집 남자랑 비교하는 그런 여자였고, 남편은 “제 경쟁상대는 늘 나 자신이죠!”라고 당당히 말하는 남자였던 것이었단 말인가. -.-


근데 여기까지 쓰다 보니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역시 우선순위나 가치 비중의 문제다. 그가 옆집 남편만큼 육아와 가사에 능숙하지 못할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그의 이 무능력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이게 회사일이었대도 그가 이렇게 무성의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가 육아와 가사 분담과 부부간 대화를 회사일의 반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그는 절대 이렇게 무신경으로 일관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무능력한 걸 못 견디는 사람이니까.    


결국 또 모든 문제는 '나'로 환원된다. 공부 잘하고 밥벌이 잘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온 이 남자에게, 여자여, 너는 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나. 시대가 변했는데 너는 변하지 않아서, 네가 옛날 남자라서 맞벌이가 너무 힘들다고. 이렇게 사는게 행복하지 않다고. 적어도 그를 붙들고 흔들어대긴 했어야지. 말꼬리를 잡을 때마다 도망가는 그를 붙들고 물었어야지. 너도 그렇지 않냐고.


그가 문제 뒤로 숨으려 들 때마다 너 또한 같이 입 닫았다. 남의 말을 어떻게 무턱대고 믿냐고, 이해가 안가면 파고드는 성격이라고, 똑똑한 채 하던 너. 그런 너는 아내와 남편의 문제에 대해 운전을 배우는 만큼도 골똘하지 않았다.


그러니 함께 침묵한 나 또한, 공범이다.   


* 맨스 플레인 : 비슷한 시기에 여러 곳에서 회자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출처를 명확히 따지기 어려우나, 리베카 솔닛이 자신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고 든다>에서 처음 언급하면서 페미니즘 용어로 자리 잡게 된 듯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6. 이상과 백일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