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상과 백일몽

당신의 이중언어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by 쏭마담
이 신념이 있으면 죄인과 죄를 아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지.
이 신념이 있으면 복수 때문에 마음을 태울 일도 없고,
타락을 보고도 지나친 혐오감을 느끼지 않게 돼.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아.
나는 종말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살고 있어.

춥고 배고픈 그곳 로우드 기숙사에서 제인은 ‘헬렌’이라 불리는 인상적인 친구 하나를 발견한다. 제인이 보기에 헬렌은 늘 선생님의 표적이 되어 부당한 지적을 당하거나 벌을 서는 것 같다. 하지만 헬렌은 항변하지도 권위에 도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지적은 자신의 결점 때문이며, 피할 수 없으면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악은 선으로 갚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이 문명화된 기독교인들의 자질이라는 것이다. 제인은 그녀의 말에 전혀 공감할 수가 없다. 그녀의 말은 한껏 고양된 정신의 세계에 속한 듯도 하고, 그저 어두운 밤을 피해 한낮에 꾸는 백일몽 같기도 하다.




맞벌이하던 시절. 잠시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정식으로 아이 돌봐주실 이모님을 구하기 전이었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두 여자 모두 벽창호 같은 남편을 두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결은 달랐지만 세대를 거슬러 여자로서 신산한 삶에 함께 공감했던 듯싶다.


“그때 세탁기가 있었나, 일회용 기저귀가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지. 애는 또 얼마나 등치가 좋았는지(그건 지금도 그렇다 ㅎㅎ). 그 훤한 걸 등에 업고 하루에도 몇 장씩 나오는 천기저귀 빨아서 햇빛에 널어 소독하고 그랬지. 먹이고 돌아서면 금세 밥때 되고... 그때는 진짜 애들만 다 키우면 죽을 생각뿐이었대이.”

어머니는 영양소 하나하나까지 따지며 식탁을 차리는 분이시다. 덮은 이불은 매일 밖에서 털어야 하고 수건은 꼭 삶아서 햇볕에 말려야 한다. 조미료가 조금이라도 든 바깥 음식을 먹으면 바로 탈이 나신다. 하루 종일 손주 이유식 해먹이다 보면 본인은 저녁까지 밥 한 숟가락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하셨다. 그러니 당신 자식들에겐 얼마나 더 정성이셨겠나. 애들 뒤치다꺼리에, 집안일에, 남편 떠받들어 모시는 일까지. 완벽하게 하려다 보니 몸이 자주 아프셨겠지. 밤이면 아이를 둘러업고 나와 하염없이 달만 쳐다보셨겠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으셨겠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놓아졌다. 누구 말대로 둘째를 낳고 나니 몸이 두 배가 아니라, 서너 배 힘들었다.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돌봄의 가짓수와 에너지의 한계치를 넘었다. 가장 중요한 것 말고는 버려야 했다. 아니 자연스럽게 버려졌다. 퇴근하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받아 오면, 저녁을 차려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입히고 치카치카를 시키고 그 사이 둘째 아이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 틈틈이 어질러진 장난감을 정리하고 큰 애 가방에서 식판과 알림장을 꺼내 읽고 아이가 어디선가 배워온 이상한 칼싸움 시연과 남자애 특유의 몸개그를 손뼉 치며 구경했다. 그러다 보면 첫째 아이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전에 그대로 둘째 젖만 물린 채 잠들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직 기운이 펄펄한 아이는 누운 내 머리 위로 인디언 추장마냥 폴딱 폴딱 뛰어다닌다. 나는 아이 발에 차일까 보아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곯아떨어진다. 그 일을 매일 반복했다.

그 시절을 생각할 때 가장 서글픈 건,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냐"고 아이 눈을 쳐다보며 진심으로 물어봐주지 못한 일이다. 내 몸과 맘은 늘 예상 가능한 서너 가지 일-먹이고 입히고 치우고 재우는 일-을 하고 있거나, 예상치 못하는 두세 가지 일-밥투정을 하다 상을 엎게 된다든가, 안 씻겠다고 버티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다 한바탕 물바다를 만드는 일 따위-에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물리적인 치다꺼리만으로도 너무 피곤했다. 아이의 투정이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와서 이제 엄마 노릇이냐’며 나를 원망하는 아이의 다른 언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어린이집 초인종이 2-3시부터 울리고, 그게 우리 엄마이길 바라며 열댓 번도 더 돌아보았을 아이. 매번 마지막에 나타나는 나를 맞이할 때면 이미 반갑던 첫 마음 따위 모두 사라진 이후라는 걸 나는 몰랐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집안일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 소파와 문틈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용도실을 정리하고, 가스레인지 후드의 기름때를 청소하고, 목욕탕에 낀 곰팡이까지 제거하며 살 여유가 없었다. 그때그때 애들이 엎지른 우유나 닦고, 나날이 크는 애들 내복이나 잊지 않고 바꿔 넣어주면 다행.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닥치는 대로 처리하고 살았다. 빨리 아이가 자라 주길. 빨리 내 손에서 벗어나길. 그리고 그때 알았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랄지, 질적 가치나 더 나은 행복 따위를 꿈꾸기 위해선 가장 기본적인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걸. 닥치는 대로 처리하고 사는 일에 얽매인 상태에선 그 이상을 꿈꿀 여유가 없다는 걸.

"그때 하나님 못 만났으면 난 벌써 죽었대이."

어머니께서는 후에 종교에 귀의하면서 비로소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셨다고 했다. 부당한 감정도, 누군가에 대한 미움도, 삶의 허무함도 그렇게 신에게 의탁하며 삶의 소망으로 바꾸신 걸까. 아니면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신 걸까. 그래서인지 나는 어머니의 삶을 마주할 때마다 한층 고양된 정신적 세계와 여전히 이상을 꿈꾸는 백일몽 사이의 이상한 간극 같은 것을 자주 만나곤 했는데, 가령 이런 거다.


나는 한 달이 다 가도록 전화 한 통 드리지 않는 나쁜 며느리다. 인사치레를 잘 못한다. 모일 때 입맛에 딱딱 맞춰 음식을 해올리는 살림꾼 며느리도 아니다. 입원하셨다거나 어디 놀러 가신다고 용돈을 척척 보내드리는 생활력 있는 며느리 역시 아니다. 어머니께서도 우리 형편이 빤하니, 아예 바라시 지도 않는다. 늘 우리 면목 없을까 보아 "니들이나 잘살아라" 하신다. 내가 봐도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가 없다. 내 주변만 해도 매번 생활비를 대드려야 하는 집, 며느리 집에 오면 뭐라도 하나 챙겨가려는 집, 아들을 남편 대신으로 생각하는 집... 얼마나 이상한 시어머니가 많은가. 없는 집은 없어서 추태를 부리고, 있는 집은 있어서 유세를 부린다. 분명한 건 내가 평균 이하의 며느리란 거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 친정 엄마도 다 아는 그 사실을 시어머니께서만 모르신다는 것. 언젠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동상이몽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내가 이렇게 여쭤본 적이 있다. "어머니도 다른 시어머니들처럼 모이면 며느리 욕도 하고 그러시죠?"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예의 자상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고? 다들 우리 며느리 같은 집이 없다고 하지." '다들'이라면 다른 사람이 우리 집안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고, 그건 어머니께서 나가서 며느리 욕을 안 하신다는 얘기. 어머니의 근거는 뚜렷했다. "성경에도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카지 않나." 그러니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사는 시어머니 앞에 나쁜 며느리인 나는 맨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한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류의 책이 유행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된다. 언제나 그랬던 거 같다. 나는 당위로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로는 몸도 마음도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스스로 좋게 보려 해도 평균 이하밖에 안 되는 며느리에게 보내는 시어머니의 치사. 나에게 그건 공치사다. 대상을 향해 제대로 날아가 꽂히지 않는 이중 언어. 나는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마냥 불안하다. 어느 날 생각했다. 그 언어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녀의 고양된 세계 속에서는 어떤 악인도 선인으로 둔갑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이상적인 고부 관계로만 존재한다. '좋은' 시어머니와 '좋은' 며느리 밖에 없는 세계. 나쁜 것도 어그러진 것도 없는 세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세계.


그리고 나는 그녀의 간절한 열망으로 지어진 도피성 안에서 극단적 절망이라는 이중 감정을 느낀다. 훼손되느니 차라리 이상향으로 도피해 버린 것 같은. 이에 대해선 앞으로도 아주 할 얘기가 많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 돼지죽이 따로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