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돼지죽이 따로 없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뭐라 해도 나는

by 쏭마담
다들 아침 식사 이야기를 하면서 입을 모아 욕했다.
가엾은 친구들! 학생들은 그렇게 욕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보육원 생활은 형편없다. 옷을 겹겹이 껴입어도 해결되지 않는 추운 방, 구역질이 날 정도로 멀건 귀리죽, 엄격한 규율 아래 경직된 분위기. 하지만 '자비로운 런던의 신사 숙녀분'의 후원에 의탁해 살아야 하는 학생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욕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춘기 전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던 첫째 아이 5학년 중반 즈음. 아이가 슬슬 입에 욕을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씨"라던가 "닥쳐", "응 아니야" 따위. 그리 수위가 높은 건 아니었지만, 아들 둔 엄마들이라면 당황스럽기 마련. 애가 태권도장에서 나쁜 형님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아들의 언어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근데 나는 아들의 말투가 그 정도로 거슬리지 않았다. 누구나 한 때 그런 적이 있지 않나. 치기 어린 반항심에 부모의 권위랄지 사회의 규범에 저항해 본 경험이. 안 그래도 또래보다 등치도 작은 아들이 수컷들 사이에서는 밀리지 않기 위해 좀 센 말도 필요했겠거니, 나는 그렇게 이해가 되었다. 워낙에 사춘기라는 시기 자체가 강렬하다 보니 ‘일반적인’ 단어로는 그 감정이 다 담기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욕으로 강조점을 찍는 거라고.


아들에게 '센 말'을 허용한 또 다른 이유는, 나는 아들이 나 몰래 숨어서 하는 게 더 싫었다. 사춘기 때 아들 둔 엄마들이 끔찍이 싫어하는 욕, 핸드폰, 게임. 이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집에서 금지가 심할수록 '밖에서 숨어서' 한다는 것. 실제로 “우리 애는 욕 안 써요, SNS 안 해요, 게임 안 해요”라고 얘기하는 엄마들의 이웃 엄마는 다 알고 있다. 그 애가 밖에선 다 하고 다닌다는 걸. 그 집 아이가 내 아이 공 핸드폰을 빌려다 카톡을 하는 건 물론이고, 페북에 떡하니 여자 친구랑 찍은 커플사진이 올라가 있으며, 내 아이 잡으러 PC방 가보면 거기 나란히 앉아 게임하고 있다는 걸. 근데 당사자인 엄마만 모른다. 나는 그렇게 나만 모르는 이웃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욕을 권장한다거나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들에게 누누이 이야기했다. "욕은, 감정 표현 잘 못하는, 표현력 딸리는 애들이나 하는 거다"라고. 그러니 쉽게 욕으로 환원하지 말고, 네 감정을 설명할 단어의 가짓수를 늘려보라고. 그리고 그 말은, 기실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부글거리거나 혹은 굳은 감정에 대해 글로 풀어놓을 때마다 현실의 나는 좀 더 말랑말랑해졌다. 신기하게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살 만했다. 근데, 그저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만 하면 되는 그 일이 왜 그렇게 이 나라 정서에선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몇 년 동안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그 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아는 글방지기들과 글쓰기를 시작했다. 파이팅 날리며 호기롭게 시작한 글쓰기. 하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우리의 갈망은 아이와 남편 수발이라는 현실적인 요구로 인해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마련. 어쩌다 짬을 내 책상에 앉으면 곧 아이들이 불러대기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며 애써 머릿속에서 짜 맞추던 글감은 어느새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그렇다. 우리에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오롯이 방해받지 않고 읽고 싶은 글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하지만 정말 우리의 도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가 이런 현실적 조건뿐일까.


어느 날, 며칠 글쓰기를 따라붙지 못한 글방지기가 내 글 아래 이런 댓글을 달았다.

"내가 배부른 소리나 하는가 싶어서..."

남편을 성토하는 글을 강도 높게 올리던 내 글 아래 이렇게 쓴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내 주변 인물들이 현실보다 훨씬 나쁜 사람(혹은 좋은 사람)으로 설정된다. 나에겐 맞벌이 때 동등하게 육아를 분담하지 못했던 남편이 그렇다. 사실 당시 내가 사표를 쓸 때의 이유는 수 십가지였다. 그런데도, 어떤 글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기 위해 오로지 남편 때문인 것처럼 강조될 때가 있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할 수 있는 얘기의 가짓수도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의 기억이란 건 도무지 자기 위주여서, 내게 불리한 기억은 저장소에 잘 보관하지 않는다.(설정상 좋은 사람이 등장하기 희박한 이유이기도 하다. ^^; ) 그러니 내가 누군가 벌인 이야기는 모두 내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그러다 보니 착하디 착한 우리 글방지기들은 글을 읽으며 덩달아 좌불안석이 된다. 무의식 중에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 시작된다. 저 집 남편보다 설거지도 많이 해주고 쓰레기도 잘 버려주고 돈도 많이 벌어주는 내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침에 벌인 남편과의 해묵은 언쟁과 내 취향 하나 몰라준다고 상했던 감정 따위, 왠지 사치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감사하지 못하다니! 글로 풀어놓으려던 부글부글했던 감정은 이내 절필의 감정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산문집 <읽다>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건 고작 ‘교훈’이나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 좋게 헤매는 경험’ 때문이라는 거다.(103p).”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네 삶의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통해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공감”(p113) 하게 된다는 거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악한’ 주인공이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같은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선량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고통받는 사람을 동정하고 그 처지에 감정 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p.150)”지만, “거침없이 자기 욕망을 실현하고, 악행을 저지르는데도 반성하지 않는 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p150)”이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교훈'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서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몰라서 "도대체 몇번을 말해"라고 잔소리 하게 하는 게 아니다. 납득되지 않으니 안 하는 거다.


그러니 결국 글을 읽고 쓰는 이유는 '공감'하기 위해서다. 한 인간에 대해 간단하게 재단하지 말고, 복잡하게 이해하라고.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번 던져보자.

나는 단순한가, 복잡한가? 무난한가, 까탈스럽나? 어리숙한가, 꼼꼼한가?

나는 자동차에 대해 고민할 때는 단순하다.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고 자동차를 무척이나 애정 하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으니 어떤 결정이든 그에게 떠민다. 하지만 나는 시댁이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불거질 때는 엄청 복잡하게 두뇌와 감정 회로를 돌려댄다. 마찬가지로 재테크라던가 집안 살림에 대해서 나는 예민하거나 까탈스럽게 굴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고르거나 글을 쓸 때의 나는 꼼꼼하고 기준이 높다. 관심이 많고 가치를 많이 두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단순하기도 복잡하기도, 무난하거나 까탈스럽기도, 어리숙하기도 꼼꼼하기도 한 그 모두가 나다. 인간은 복잡하고 불가해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화면 앞에 앉을 때마다 정작 나를 막아선 건 '자기만의 방'이 아니었다. '내면의 목소리'였다. 내 욕망은 다른 이들의 욕망과 맞물려 있어서, 글을 쓸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 또는 그녀의 욕망들이 소환되었다. 흔히 자신과 떨어져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라고, 그럼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타인에 의해 해석된 삶 또한 아이러니하게 객관적이지 않다. 내 눈에(혹은 그들 눈에) 비친 그들(혹은 나)의 삶은 나(또는 그들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구성된다. 딱 내 경험치만큼 제한되고 내 세계관 안에서. 그러니 당사자에게는 평가요, 칼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겠니? 네 글이 그만큼 가치가 있어?


이 글들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묻던 질문들에 대한 답이다. 적어도 그들을 법정에 세우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 사람은 그렇게 어느 것 하나로 규정하기엔 너무 복잡다단하고 불가해하다는 것. 그걸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쓰고 있다는 것.


나는 오늘도 읽고 쓰며, 스스로 단죄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돼지죽이 따로 없군"이라고 내 삶을 한탄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고. "돼지죽이 따로 없군"이라고 누군가 내 글을 평가하는 말에도 동요하지 말자고.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나를 위로하고 너를 이해하고 세계를 확장하는 일로 나아가겠다고. 오늘도 다짐하는 것이다.



<읽다>. 김영하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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