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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Aug 19. 2022

비스켓 한 조각과 우유 한 컵

기묘한 이야기(7) - 먹어치우는 여자들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긴데, 나에게는 비스켓 한 조각과 우유 한 컵에 대한 로망이 있다. 


그녀는 가벼운 무명의 혹은 린넨 원피스를 입고 침대에 앉아 있고, 하녀가 비스켓 한 조각과 우유 한 컵이 차려진 쟁반을 건넨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난 밤 앓았던 가벼운 열병의 흔적이 남아 있고, 어쩌면 그건 그녀가 상시 앓고 있는 질병인지도 모른다. 식욕을 잃은 지는 오래되었다. 부모님은 딸에게 뭐라도 먹여보려 애쓰지만 몇년 째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녀가 오늘도 늦게까지 침대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날 수도원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결혼이라는 인생의 거대한 결정 앞에 마음을 정하지 못한 중이거나.   


지난 토요일 아침, 빵을 사러 베이커리에 들렀다. 남편은 이미 간단하게 밥과 국으로 아침을 물른 뒤였고, 큰 아들이 요구하던 도넛은 아직 진열되기 전이었다. 무얼 골라야 할까. 일단 늘 한결같은 둘째 아들의 최애 소시지빵을 집고 최근에 맛들였다던 치킨 샐러드도 골랐다. 큰아들은 도넛 대신 뭘 사가야 할까? 수시로 변하는 큰아들 입맛을 맞추는 일은 늘 어렵다. 도넛 대신 꽈배기라도 사갈까? 한때 잘먹던 땅콩크림빵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애가 안먹으면 며칠 굴러다닐 게 뻔할 텐데. 그래도 몇가지 선택지라도 늘어놔야 그나마 뭐라도 먹을 텐데... 


안그래도 입 짧은 애가 최근 치과에 다니며 그나마 먹는 가짓수도 줄었다. 입맛이라도 혹 돌까 싶어 양송이 스프를 하나 더 바구니에 담는다. 다 큰 아이 아침 한끼 거르는 게 뭐 대수라고, 다 내려놨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망설여지는 아침, 선택의 가짓수. 혹시나 싶어 남편의 샌드위치도 하나 더 담아 계산을 치르고 나오는데, 베이커리 문을 나서자마자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그나저마 점심엔 또 뭘 먹나? 

 

중세 여성의 신비체험에 대한 글을 읽다가, 그 시대 여성에게 있어 금식이 일종의 자기통제의 한 방편이었다는 구절을 보았다. 결혼도, 직업도, 그리고 재산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던 중세의 여성들.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가 바로 음식에 대한 거부였다는 거다. 그녀들은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원치 않는 결혼을 시키려던 부모에게 반항하고, 완고한 가부장적 남편을 통제하고, 극도로 쇠약해진 가운데 엑스터시에 빠져 발작을 하거나 때론 신비체험에 들기도 했다는 건데... 걔중 어떤 여성들은 그 체험을 자산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 교회라는 완고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자기만의 작은 영역을 고수할 수 있었다는, 정말 이상한 이야기였다.  


하긴, 현대 여성의 지나친 다이어트나 섭식 장애 이면에도 자기 몸에 대한 일종의 통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지 않은가. 남자친구는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내 몸은 내 맘대로 통제 가능하니까. 몸을 줄였다 늘임으로써 내가 적어도 내 삶은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혹은 안도. 남자친구가 혹 이별을 통보한다 해도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는,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는, 그러니 나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 없다는. 가학 혹은 도피처로서 몸과 음식의 관계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해보면 먹어치우는 여자들의 심리도 비슷한 것 같다. 남은 음식은 죄악이므로 빨리 먹어 없애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지 않나. 먹고 남은 음식은 내가 가족들을 위해 최선으로 차린 음식이자 그들의 취향과 구미와 정량을 비껴간 나의 실책이니까. 먹어치움으로써 방만하게 차려낸 나의 실수를 덮고 내 행동에 대한 책임도 지는 것이다. 안그래도 인간이 내쉬고 배출한 수많은 물질로 앓고 있는 이 지구에, 음식쓰레기 하나 더할 순 없는 것이다. 


최악은 이 심리에 정리벽이 가세할 때다. 늘 주변이 정리되어야 하고 자신만의 구획 안에 질서정연하게 놓여져야 하는 깔끔쟁이들. 하긴, 그들은 대체로 살림꾼들이라 남기고 버리는 일로 끙끙 앓는 일 자체가 가짓수에 없을지도 모른다. 늘 갈팡질팡 하는 내가 문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꾼다. 

비스켓 한조각과 우유 한 컵이면 충분한, 

누군가의 구미에 맞추려 애쓰거나  

쓰레기를 만들어낸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그 소박한 식탁에 대한 로망을. 


1) <낯선 중세> 유희수, 제4부 신앙과 상상의 세계-여성에게 음식이란 무엇인가(385-3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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