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임신한 여자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임신을 했다는 건, '나 남자랑 잔 여자'라는 거잖아. 너무 웃기지 않아?"
그녀에 논리에 의하면, 임신한 여자가 남자와 함께 걸어간다는 건 "나는 이 남자와 같이 자는 사이"란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거다. 임산부를 보며 '생명을 잉태한 여자'가 아닌, '남자와 잔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미 결혼해서 한 남자와 매일 밤 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임산부가 될 가능성이 100%였던 나는 당시 그 말에 픽, 웃고 말았다.
최근에 들은 이상한 이야기는 이웃집 여자의 남편의 직장 후배 버전이다. 후배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이었는데, 몇 달 전 지인을 통해 여자 하나를 소개받고 주욱 만나다가 이번에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근데, 결혼을 앞두고 남편에게 털어놓은 후배의 속내가 기이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소개받은 여자와 만나며 속궁합이 너무 잘 맞아서 좋았는데, 막상 결혼을 하려고 보니 의심이 든다는 거다. 의심? 남편이 무슨 말인가 해서 반문하자 후배는 살짝 수줍어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자가 잘해도 너무 잘하니까, 막상 의심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뭐라고 했대?"
우리가 모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이웃집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남편이 이렇게 점잖게 충고했대.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라고."
은희경의 단편 <중국식 룰렛>에도 이상한 여자 하나가 나온다. 장례식에 갔다가 15년 만에 만난 옛 남자 친구에게 "한번 같이 자달라"고 제안하는 여자다. 안정된 가정에 남편과 사이도 좋다고 알려진 그녀. 바람기가 있다거나 무책임한 이미지도 아니었던 그 여자는 왜 이제와 다른 남자와 한번 자보려고 했던 걸까? 이유인즉슨, 평상시 남편과 관계를 하고 나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왜 이런 단조롭고 평범한 일을 남편 아닌 사람과 해서는 안된다는 걸까',라고.
평생 한 남자 하고만 잤다는 사실이 세상을 오해하게 만든 점은 없었을까,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면 무엇이 다른지 혹은 다르지 않은지 알고나 살아야 하지 않을까.
섹스에 대해서라면 내 주변에 - 특별한 날이면 여전히 교복을 차려입고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부터 '이제는 그만 졸업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여자-까지, 다양한 여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결혼과 섹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르는 결론은 동일하다. "결혼 전에 남자 좀 많이 만나볼 걸.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을까."
그러게.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을까. 이렇게 단조롭고 평범한 일을 왜, 남편 아닌 사람과 해서는 안된다고, 남편이 생기기도 전에 멍에처럼 메고 살았을까.
최근 인문서들을 읽으며 섹스에 대해 내가 내린 또 다른 기이한 결론은 이 모든 게 유전자 탓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외로움을 타는 타입이 아니었다. 남편이 꼭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자식? 내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나에게 어린아이란 다소 번거로운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내가 누군가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때 되니 아이 낳아- 조부모의 품 안에 안겨 준다! 모두 내 기획에는 없었던, 이 실상 자체가, 이게 이게 다 유전자의 농락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껏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인간 종족의 번식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를 위해 나를 생존 기계 삼아 이 세계에 씨를 퍼트린 다 이놈의 유전자의 기이한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 그 사실이 나를 오해하게 만든 또 다른 점은 없었는지, 오늘은 그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