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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Aug 12. 2022

잃어버리는 감각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울지 않으면 어쩌지?



"나는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내가 울지 않을까 봐, 걱정돼."

남편이 살면서 나에게 드러낸 유일한 걱정이다.


나도 요즘은 가끔 아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느 날 갑자가 죽어버린다 한들 이 녀석, 날 위해 울어주긴 할까."

날 위해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저를 위해서라도 울 줄 알까. 슬픔이 무언지 알기는 할까. 나에 대해 그 정도 애도의 감정은 있을까.


큰아들 사춘기 초반. 뭔가 속상한 일 때문에 한 소릴 빽, 하고 부엌 구석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못 알아주냐고,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거냐고. 불안의 안드로메다 어디쯤에서 별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속 울움 중이었는데, 문득 정수기에 물 한잔을 따르러 나온 아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뒤에 대고 기어이 또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죽겠다!"

그러자, 아무런 빛도 담지 않은 그 눈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죽어!"


돌아보면 여느 집에서나 있는, 엄마 뜻대로 살아주지 않는 아들에 대한 푸념과 경악이 어우러진 사춘기 살풍경 중 하나였건만, 그 감각이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 무감각의 감각이. 내 아들이 평생 저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아들 둔 엄마라면 하루에도 몇 번쯤 겪게 되는 그 불안의 감각이.


엊그제 아들의 앞니 하나를 발치했다. 한 달 전 킥보드를 타고 가다 넘어진 탓이다. 사고가 있기 몇 달 전부터 킥보드에 대한 각종 주의와 경고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킥보드를 타고 다녔다. 주변에 그런 아들을 제재할 수 있는 부모도, 그 제재를 따르는 아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이에 자신이 몇만 분의 일의 확률로 불행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  


"엄마 미안해..." 하며 첫 사고 소식을 전하던 아들이 기억난다. 병원에서는 다행히 잘하면 덜렁거리던 앞니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한 달 동안  지켜보자 했다. 잘 먹고 잘 자며 놀란 이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보자 했다. 우리는 일말의 행운 앞에 안도했다. 하지만, 아들의 한 달은 여전히 밤낮이 바뀐, 라면이 주식인 생활이었다. 잘 먹고 잘 자야 이를 살릴 수 있다는 어른들의 충고보다 본인의 불행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까. 여느 날은 자신처럼 킥보드를 타고 가다 차와 충돌해 몇 바퀴 공중회전하는 동년배의 짤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같은 결의 실수를 하고도 타인의 불행에 근접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나는 다시 휘청거렸지만, '그래 이건 스스로에 대한 자조일 거야, 타인의 더 큰 불행을 보며 나의 작은 불행에게 보내는 위로.' 그렇게 다시 나를 다독였다.   


한 달 후. 제자리를 찾아가는 줄 알았던 아들의 이는 뒤늦게 허옇게 금을 드러내 보였다. 엑스레이 사진 너머 치근 깊숙이, 실낱처럼 가늘었지만 절단면이 분명해 보이는 금이었다.

"이도 충격이 컸을 테니까요. 뒤늦게 이렇게 상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이는 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의사는 아직 어린 학생인데 발치를 하게 되어 너무 속상하다며 연신 우리를 위로했지만, 나는 오히려 덤덤했다. 속 끓는 마음에 오래도록 단련된 탓인가. 아님, 내 마음 아무리 애달파도 가닿지 않던, 숱한 경험이 준 처방인가.  


그저 아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잃어버린 감각에 대해서 배우게 되길.

앞니 하나 보다 더 큰 상실에 대해 깨닫게 되길.

그러니 신이시여, 부디 더 이상의 재앙은 마옵소서...


절단면이 선명한, 아직 피가 배어 있는 아들의 앞니 하나를 제단에 올리며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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