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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Sep 12. 2022

아이고, 우리 상무님 오셨습니까!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는 여자들



조선시대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다. 그녀에게 아들은 "상무님"이고, "교수님"이며, "목사님"이다.


결혼하고 첫 명절, 시댁을 찾은 한 이웃 여자의 에피소드. 초인종을 누르고 문 앞에서 기다렸는데, 어머니께서 버선발을 하고 반갑게 뛰어나오시더란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으며 하는 말.


"아이고, 우리 목사님 오셨습니까!"


심지어 그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말끝마다 "너는 이렇게 좋은 남편과 사 얼마나 행복하

니?" 하며 아들을 지긋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통에 영화 <올가미>가 따로 없었다고 했다.


문제는 정작 아들들이 자기 어머니를 좋아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홀어머니 일이라면 껌뻑 죽는 아들도 명절에 이틀만 함께 먹고 자면 은근히 먼저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지 않나.  홀아버지 불쌍하다고 내내 모시고 살아야 한다던 아들도 곁에서 한나절 병시중을 들고 나면 한동안 잠잠해진다. 끝도 없는 잔소리와 터무니없는 호령, 또 그들은 다른 사람 말은 귓등으로 듣는 얼마나 고집불통들인가. 부모와 자식 사이라는 이름만 떼고 보면  영락없이 '비호감'이다.  


다행히(!)  나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아들 여섯 살 때. 아들 녀석의 애교 짓이 얼마나 이쁜지, 마주 보고 키득거리다 우연히 저 너머 거울로 내 얼굴을 본 것이다. 아, 고무줄 하나로 대충 질끈 묶은 산발한 얼굴이 기미와 주근깨와 함께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뭐가 좋다고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가 따로 없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바라보는 것과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내 아이는 나만큼 달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경험 덕분에 혹독했던 아들 사춘기도 조금 견딜 수 있었다. 어느 저녁 내가 해준 밥을 너무 맛있게 먹는 아들을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던가 보다. 문득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들 녀석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뒤이은 한 마디.

"쳐다보지 마."

아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나. 그래, 빈정 상하지 말자. 화내면 안 된다. 밖에 나가면 얼굴 뽀얗고 앳된 여자애들이 살 냄새 폴폴 풍기며 네 앞에 어른거릴 텐데, 그래그래, 늙은 여자가 눈빛을 빛내며 잡아먹을 듯 쳐다보면 음식이 목구멍에 제대로 넘어 리 없지...


아들 입장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떠받드는 시어머니 괴담은 전국 방방곡곡 지방 민담만큼이나 여러 버전으로 들어왔다. 일찍 죽은 남편 대신 장남 노릇을 해온 아들을 계속 가스 라이팅 하며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시어머니부터 자신을 무시하던 무능한 남편 대신 사위에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친정 엄마까지. 그리고 우리 세대에는 적어도 그런 일은 없으려니 생각했다. 융의 해석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말 안타깝게도, 헌신적 애정이 저주가 될 때가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을 아들을 통해 대신 이루려고 했으며, 이는 "우리 의사 아들이 말이야"로 시작되는 수많은 농담의 소재가 되었다... 이런 여성들의 경우 아니무스의 발달, 곧 자기주장을 하거나 경쟁력과 권력을 얻는 등의 일과 관련된 내면의 남성성을 발전시키는 일이 그 시대의 문화가 강요하는 여성의 성역할로 인해 자주 한계에 부딪혔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 그 욕구를 대리 충족하려 한 것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 속에 공존하는 여성성과 남성성.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성의 부모를 통해 다양한 영향을 받으며 조화로운 상을 맺게 된다. 하지만, 어떤 성의 부족이나 왜곡된 양육방식은 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저해하고, 성인이 된 후  부부관계에서 다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는 것이다.


그러니 시어머니 안의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남성성이 이런 일그러진 시어머니 괴담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역할의 한계에 대해서라면 우리나라만큼 치열한 곳이 있던가. 융에 의하면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은 모든 아이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 마련이지만, 여성의 경우 특히 아들에게 투사되기 쉽다고 한다. 여성 안에 '자기주장을 하거나 경쟁력과 권력을 얻는 등의 일'이 막히면 내면의 남성성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그것이 아들을 통해 비틀린 모습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아들 교육에 목숨 거는 돼지엄마와 헬리콥터 맘도 다 같은 뿌리 아닐까. 집에 들어앉기에는 너무 고학력이 되어 버린 우리 시대 애매한 여자들. 서구 교육의 영향으로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했으나 여전히 가부장이라는 근대적 기획이 남아 있는 사회와 가정 안에서 분투하다 집안으로 도태된 여자들.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집안일 중 그나마 아이들 교육만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렇게 그녀들은 돼지엄마와 헬리콥터 맘이 되어 훌륭한 아들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다. 아들을 상무님으로 만들며 상무님을 키운 훌륭한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명절날 집에 온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우리 상무님 오셨습니까!"


그러니 나는 참는다. 아들이 너무 예뻐도, 오래 쳐다보지 않기로. 빈정 상하지도 않기로. 시어머니 괴담을 생각하며... 훗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기로 오늘도 다짐하는 것이다.  



<남자로 산다는 것> 제임스 홀리스 저, 더 퀘스트, '2. 여성성 공포증:내면과 외부의 여성'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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