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쩌다 좀 번듯한 옷을 입고 동네를 나서면 이웃 엄마들이 묻는다. 어디 모임에 다녀왔냐고. 늘어난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가 아니라는 거다. 평소보다 조금 멋져 보인다는 거다. 그건 좀 차려입고 누굴 만나러 다녀온 게 분명하다는 거다. 그럼 나는 너스레를 떨며 이렇게 대답한다.
"너네는 평상복, 외출복이 따로 있구나? 난 평민이라 그런 거 없어. 그냥 조금 나은 평상복이 외출복이야."
놀랍게도(!) 세상엔 봄옷과 가을옷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 다닐 때 옷 잘 입는 내 동료에 의하면, 긴팔이라고 다 같은 긴팔이 아니란다. 짧은 팔도 아니고 두꺼운 외투도 아니고, 기온이 마이너스에서 30도 이상으로 널을 뛰는 것도 아닌데, 봄에 입는 옷과 가을에 입는 옷은 다르다고 했다. 어떻게 다르냐고? 그게 궁금하다면 딩동댕~ 당신도 평민입니다!
재작년 여름엔가 동네 상가를 지나다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블라우스를 만났다. 평상시 가격보다 2-3만 원쯤 센 가격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센스 있는 사람이야 시장에서 산 티셔츠로도 명품처럼 차려입을 수 있고, 돈 많은 사람은 그냥 백화점에서 사 입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 같이 센스도 없고 돈도 없는데, 그래도 옷은 입고 나돌아 다녀야 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불안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마련. 어쩌다 눈에 좀 드는 것이 있으면 재빨리 장바구니에 쓸어 담아야 한다. 저 수렵과 채집시절 우리 조상들이 열매를 만나면 바로 제 입으로 가져가 털어 넣었던 것처럼. 언제 또 이런 걸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가 명품을 알 리 없었다. 늘 사는 39,000원짜리 보다는 디자인이 독특해 보여서, 내 몸의 라인을 살짝 감춰줄 만큼 옷의 질감이 좋아 보여서, 그걸 입으면 그래도 '언니,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요?'라는 말을 들을 만큼 평상시보다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서. 그래서 선택한 게 하필 명품 짝퉁이라니.
그때부터는 내 안의 양심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지 않았나. 지적 재산권과 디자인 저작권 침해 문제가 얼마나 많은 창작자들의 창작의욕을 떨어트리고, 우리 경제 활성화를 저해하는지. 이런 불법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우리의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주절주절. 나는 학생들에게 누누이 그걸 가르치는 선생이란 작자인데...
내 안의 다른 목소리가 갑자기 뾰족 튀어나오더니 이렇게 속삭였던 거다.
봄옷 가을옷도 따로 없는 주제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런 건 귀족들이나 하라 그래. 저녁 한 끼 먹으려고 멀쩡한 드레스를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고 만찬석에 들어서는, 그런 돈 많은 귀족들이나!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고전을 읽으면서도 주인공의 서사보다 주변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톨스토이의 역작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나는 시대적 한계에 갇힌 그녀의 비극적 사랑 보다, 그녀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서 정성을 들여 치장하는 모습에 더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그녀는 옷 한 벌도 자기 손으로 입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으면, 하녀들이 드레스 옷매무새를 다 잡아주었다. 머리를 올려주고 귀고리를 걸어주었다. 저 여자는 아들 따위 품에 안고 외로워본 적도 없겠지. 재워주는 유모, 먹이고 입히는 유모 다 따로 있을테니. 아이를 씻겨본 적은 있을까. 침대에서 몸만 쏙 빠져나갔다 와도 저녁엔 풀을 먹여 빳빳하고 고소한 햇빛 냄새가 밴 이불을 덮고 잘 터였다. 남편이 허구한 날 손님을 초대한들 정색할 필요도,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집안 요리사에게 손가락만 까딱 하면 될 테니.
그렇게 삐딱선을 타기 시작하자 그녀의 외도와, 그녀의 우울이, 세상 아쉬운 것 없는 여자의 투정처럼 보였다. 귀족도 계급도 사라진 이 시대에 나는 150년 전 소설 속 그녀를 질투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