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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Sep 21. 2022

강남, 잃어버린 세계

그때 부동산을 깔고 주저앉았더라면



어린 시절을 강남에서 보냈다. 내가 살던 고층 아파트 뒤쪽으로는 저층 주공아파트가 펼쳐져 있고, 베란다 앞쪽은 여전히 비만 오면 맹꽁이가 울어대는 논밭이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그곳은 물을 채워 임시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곤 했는데, 볼을 빨갛게 하고 신나게 얼음을 지치다가 임시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 먹던 어느 겨울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얼얼했던 발목이 스케이트 날을 곧추세워 볏짚과 진흙이 뒤엉킨 바닥을 조심스럽게 내디딛던 차가운 오후가.


그곳 지금 스타팰리스가 들어섰다.


내 기억 속 강남은 다른 동네와 별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투기니 8학군이니 사교육이니, 그딴 것도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만 내려놓고 무조건 나갔다. 저녁때까지 놀이터를 오가며 초록 청개구리를 잡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스카이 콩콩을 찧었다. 쨍,하던 공기가 어느덧 노긋노긋해지고 붉은빛이 뒷산에 내려앉기 시작하면, 멀리 아파트 9층 복도에서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우릴 불렀다. 좋은 시절이었다.


생각해보 나의 부모님 참 운이 좋았다. 강남이 몇십 년 후에 대한민국 부촌의 상징으로 불릴 거라는 걸 1도 모르던 시절, 그곳에 터를 잡고 가정을 일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늘 지금 노년의 불우함이 자기 인생의 불운함 때문이라 한탄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강남의 고층 아파트, 신문사 편집부 차장, 예쁜 아내와 아이들. 그건, 그 시대 행복한 가정을 가리키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 두고, 강남의 아파트를 팔고, 우리가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강남을 떠난 뒤에도 친정 엄마를 따라 강남에 진출한 작은 이모는 그곳에 남아 계셨다. 이모부는 은행에 근무했고, 은행 직원들은 낮은 이율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모 부부는 강남 주변의 아파트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신문강남에 아파트 몇 채쯤 가진 부자들은 주로 편법로 부를 일군 악덕 투기꾼처럼 묘사하지만, 내가 아는 이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 시절은 '우연히' 강남에서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 그저 부동산을 깔고 앉아 버티기만 해도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우리 부모님이 재산을 불리는 데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아버지가 더럽고 치사한 꼴 좀 참으면서 직장에서 명예롭게 퇴직하셨다면, 그래서 강남의 아파트를 팔아 그 돈으로 아이들 교육시키는 대신 건물에 투자했다면, 내 아이들도 지금쯤 강남에 건물 두 세채 씩 가진 든든한 뒷배, 조부모의 후광을 입고 있었을까.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나서 친정 엄마 옆으로 이사가 사는 경우가 많으니, 나도 강남을 기반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겠지. 그랬다면 내 초등학교 친구들처럼 친정이 강남이란 이유만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남편이 평생 벌어온 것보다 더 많은 유산이 생길지 모른다는 가능성 만으로 남편 앞에서 좀 더 당당할 수 있었을까. 목을 빳빳이 세우고 목소리에 힘이 실릴까.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주변에선 학원비 벌러 나가는 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찌나 수완들이 좋은지, 부동산에서 몇 달 알바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격증을 따고 물건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남 밑에서 받는 수수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자, 부동산을 직접 차렸다. 간도 크지, 억대 부동산을 사들이고 되팔기 시작했다. 부동산 매매 차액 만으로도 남편 연봉을 훨씬 뛰어넘게 되자 이번엔 남아도는 잉여 자본을 가지고 무인 카페니 무인 아이스크림점에 투자했다. 한 달에 몇천 만원씩이 통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억 짜리 계약서 쪼가리 하나에 벌벌 떨던 여자가 이제 억대 사업가가 되어 기세 좋게 재산을 불려 가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내 불행 중 많은 지분이 이들 여자들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나와 똑같이 살고 있었다. 밖에 나가 돈을 벌어들이거나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남에 아파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들 유학을 보내고 골프를 치러 다녔다. 성인이 되어 동네에서 학부모로 만난 친구들은 나와 달랐다. 수완 좋은 그들은 적극적으로 노동을 팔아 돈을 벌었다. 부동산을 사들이고 카페를 내며 자력으로 부를 이뤄 나갔다.  


결정적으로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나처럼 주눅 들며 살지 않았다. 나는 강남 출신에, 노동도 팔고 있는데, 그들의 세계는 나와 달랐다. 내가 앞으로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진입할 수 없는 세계. 우리 사이에는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강이 가로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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