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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0. 2022

모든 것은 양말에서 시작되었다

아이한테 맞춰주는 게 눈높이라고요?



사춘기의 첫 전조는 '양말'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집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양말을 같이 신었다. 세 살 터울이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데다 첫째 아이는 몸집이 작았다. 서랍에 세탁한 양말을 한꺼번에 넣어두면 둘이 각자 알아서 신고 나갔는데, 어느 날부터 첫째 아이가 아침마다 울부짖기 시작했다. 신을 양말이 없다는 거다.


달려가 보면 양말 서랍엔 아직도 '멀쩡한' 양말이 10켤레가 넘었지만 아이 눈에 그건 '신을 수 있는 양말'이 아니었다. 발목이 조금이라도 늘어난 양말은 유난히 발목이 얇았던 첫째 아이에게는 조금만 걸어도 실실 기어 내려와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모두 신으면 안 되는 양말이었다. 양말에 유효기간이 따로 있지 않고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누렇게 바래고 슬슬 발목도 늘어나기 마련이건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적응하며 살 법도 했는데, 첫째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늘 새로 산 양말을 먼저 골라 신고 나서 쫀쫀한 양말이 다 떨어지면 신을 양말이 없었다.


그렇다. 첫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좀 예민했다. 티셔츠를 사면 늘 뒷 목에 달린 탭부터 떼어냈다. 천이 조그만 까슬까슬해도 입지 못했다. 바지통이 너무 커도 안되고, 몸에 좀 붙어도 안됐다. 너무 깡깡한 새 신발도 거슬렸다. 남자애 치고 유난스럽게 까탈스러웠다. 그러니 늘 늘어난 양말은 둘째 몫이 되고, 수건도 첫째  아이가 새 걸 꺼내 쓰면 둘째는 쓰고 걸어놓은 걸 받아 썼다. 둘째 애는 뼈가 굵고 살집도 있는 데다 원체 무난한 타입이니까 여차 저차 서로 암묵적으로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아이를 이렇게 이해했다. 왜 우리 어른들도 어쩌다 좀 맘에 들지 않는 옷이나 신발을 신고 입고 나간 날은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곤 하지 않나. 나는 첫째 아이가 워낙 다른 애들이 비해 말랐고, 그러니 같은 양말도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자주 흘러내려 신경을 거슬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좀 얄미운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양말 그까짓 거 몇 푼이나 한다고! 나는 새 양말을 더 많이 넣어주는 것으로 해결을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딴엔 예민한 아들에게 그 정도는 맞춰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아이의 예민한 가짓수가 자꾸 늘어났다. 덩달아 내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날도 늘어났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솔솔 피어올랐다. 때마침 오랜만에 다시 통화가 된 후배에게 아들 때문에 미치겠다고 속을 털어놓았다. 후배는 10년이 넘은 베테랑 상담사였고, 나는 이 참에 무슨 조언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던 거다. 


"큰 아이는 신체적으로 말랐고 예민하니까, 내 딴에는 맞춰준 거거든. 나름 눈높이를." 


"어디 부분이 애들 눈높이라는 건지? 설마, 선배.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한 것을 지금 눈높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전화기 너머 후배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단호했다. 이미 후배는 우리 집 아들보다 2배쯤 예민한 아들을 키우고 있었고, 그러니 내 말 한마디에도 후배는 내 양육 태도와 아들의 기질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1년 여 베테랑 상담사인 후배와 만나 상담 아닌 아들 수다가 시작되었다. 




베테랑 상담사는 말했다. 만약 엄마인 내가 그때 어떤 기준에 맞춰서 한결같은 태도로 밀고 나갔다면, 아이도 그 다음엔 조금씩 목이 늘어난 양말에 적응해 갔을 거라는 거다. 후배는 아래와 같은 대화 메뉴얼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네가 불편해하는 건 알아. 그래서 엄마도 되도록 네게 맞춰주려고 했어. 하지만 매번 너만 새 양말을 사줄 수는 없어. 너의 불편함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우리 조금씩 양말 신는 기간을 늘려보는 건 어때?'

(이것이 여러분~ 대화 매뉴얼의 정석입니다. 집에 발목이 늘어나서 울부짖은 아들이 있다면 늦기 전에 활용해보세요.)


나는 다시 항변했다. 

"난 아이마다 다 성향이 다르니까. 그에 맞춰 양육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거거든. 그리고 양말은 사소한 거잖아. 싸고."


"사소하다는 건 엄마 기준이죠. 비용이 저렴하니까 사소한 거고, 비용이 많이 들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게 사소하고 어떤 게 중차대 한 거죠?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잘 몰라요. 우리가 흔히 애들 행동이나 습관을 고쳐보겠다고 ‘칭찬 스티커’ 많이 사용하잖아요. 근데 쉬운 방법인데도 많이들 실패해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칭찬의 목표와 보상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보통 엄마들은 '말 잘 듣기' 식으로 모호하게 목표를 세워요. 그럼 아이 입장에선 헷갈리죠. 엄마가 어쩔 땐 스티커를 붙여 주는데 어쩔 땐 안 붙여 줘, 근데 말을 잘 들으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몰라요. 구체적이어야 해요. 예를 들면, ‘집에 들어오면 바로 실내복으로 갈아입기’처럼요. 물론 실내복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 인지 시켜주는 게 먼저겠고요. 스티커를 50장 모으면 어떤 보상을 해줄 건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얘기해줘야 해요."


기준이고 구체적이고 뭐고. 칭찬 스티커 한번 제대로 사용해본 적 없는 엄마였던 나는 그만, 육아 선배 아니 후배 아니 10년 차 베테랑 상담사 앞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굽힐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의 불편함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건 중요하지만, 아이의 까다로움을 부추기거나 무조건 맞춰서 더욱 강화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선배의 말처럼 아이가 양말에만 유독 예민하게 굴고 까다롭게 구는 거니, 그것만 맞춰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죠. 문제는 이게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거예요. 당장 둘째가 형으로 인해 피해를 받잖아요. 물론 지금은 사안이 작고 둘째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말이죠.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어요.


듣다 보니 10년 넘게 육아를 하며 나는 '눈높이를 맞추는 것'에 대해서 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칭찬과 보상. 구체적 목표. 강화 행동. 내겐 모두 낯선 단어들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소한 반격에도 그만 정신이 까무룩 해지는 개복치과. 구구절절 모두 옳은 그 말 앞에서 당최 내게 기준이란 게 있었나 싶었다.


그간 내가 구축해온 세계에 쩌억, 실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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