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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0. 2022

당신의 아들은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아들과 개의 공통점(12) - 조현병 전구증상인 사춘기병입니다



우리 집 댕댕이는 먹을 걸 주면 바로 받아먹지 않고, 꼭 코로 먼저 확인을 한다. 맛있는 간식이나 어쩌다 아주 양념이 기막히게 배합된 갈비 따위를 받아먹을 때 특히 그렇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이런 핀잔 한마디를 듣고야 마는데.  

"야 이놈아, 너는 주인을 그렇게 못 믿냐? 왜? 고기에 독이라도 묻혔을까 봐?"

(맨날 뼈에 붙은 코딱지 만한 비덩어리 하나 겨우 떼어 주면서 생색은!)

 

어느 날 이런 댕댕이들의 행태가 궁금해 강아지 백과사전류를 찾아보았는데, 아뿔싸. 개는 시력이 약해서 가까운 거리의 것을 잘 못 본다는 거다. 게다가 미각보다 후각이 훨씬 더 발달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주면 코로 먼저 한가득 음미한 뒤 입으로 삼키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왜 커피도 맛보다 커피 향이 훨씬 더 좋은 것처럼.  

아아~ 그래서 너는 맛있는 것을 오래 씹을 필요가 없었던 거구나. 이미 코로 다 먹었으니! 엄마 맘 같아선, 맛있는 것일수록 입안에서 오래 음미하며 천천히 씹어 먹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집 댕댕이는 늘 걸신들린 것처럼 한꺼번에 꿀꺽 삼켰다가 결국 덩어리 채 와락 게워내곤 했는데. 그뿐인가. 토한 걸 치우려고 하면, 으르렁~ 거리며 끝까지 사수하는 바람에 '에잇, 더러운 놈'이란 소릴 또 들어야 했다. 이제야 그 모든 퍼즐이 꿰맞춰졌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댕댕아.


인간도 그렇지만, 개에게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최근엔 이런 일도 있었다. 동네 친구가 근처에 애견 놀이터가 새로 생겼다며 나에게 한번 가보라고 했다. 지나가다 봤는데 늘 차가 북적이고, 생기자마자 엄청 핫플레이스가 되었다는 거다. 그리곤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근데, 피치가 혈통이 어떻게 되지?"

"어? 혈통이라니?"

"다녀온 사람들 말에 의하면, 거기가 근데, 개들의 혈통을 본대."

"무슨 개가 귀족도 아니고~ 순종인지 잡종인지 다 따져서 개를 받는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딨냐?"

"그럼 족보인가? 분명 족본지, 혈통인지 그런 걸 본댔는데. 그런 거 없으면 못 들어간다던데?"


아하, 강아지 인식표? 그걸 말하는 거구나... 그제야 나는 그 친구가 혈통이니 족보니 운운하던 것이 강아지 인식표를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 간혹 공격성이 강한 특정 견종이나 몸무게 킬로수로 출입을 제한하는 곳은 봤어도, 개에게 혈통이나 족보라니! 개를 키워본 적 없는 친구에게 '인식표'라는 말은 낯설었고, 그래서 그녀의 메모리에 그와 비슷한 단어로 둔갑해서 저장된 것이 바로 '혈통과 족보'였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깔깔 웃었다.


언어학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표현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관련된 이해도 없다는 뜻이다.'  


아들 사춘기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 나는 매일 같이 이런 단어들을 검색창에 때려보고 있었다. '사이코패스의 특징' 따위. 혹은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같은 정신병리학 관련 대중서를 미친 듯이 탐독했다. 교사가 쓴 청소년 심리책도, 종교 철학자가 쓴 사춘기 아들 책도, 사춘기를 갱년기와 대비시킨 그 어떤 책도 내 아들의 상태를 정확히 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앤드류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 '조현병' 편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발견하곤 그만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정신분열증 전구증상 단계임을 암시하는 일단의 증상들을 정리했는데 의심, 특이하고 불가사의한 또는 기이한 사고방식, 행동 방식의 극단적인 변화, 기능 감소, 학교나 직장 생활에서 보이는 무능력 등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 대부분이 평범한 사춘기 증상이기도 하다는 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p.569).”


사춘기. 조현병의 전구증상. 아, 역시 그랬던 거. 애가 '미쳐' 있어서 내가 렇게  혼란스러웠던 거. 궤변을 늘어놓고, 부모를 거하고, 지독하게 이기적이며, 학생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밤마다 짐승마냥 씻지도 않고 잠드는 게... 래서 엄마로 하여금 신병리학 용어들을 검색하게 한 이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한 조현병 아니 사춘기 증상이었구나. 그래서 그 많은 전문서들이 나에게 불치병처럼 수많은 해법을 늘어놓으며 또다시 나의 혼란에 부채질을 한 거였구나.


그때부터 단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의 사춘기를 수식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분명 아들에겐 사이코패스와 조현병과는 다른 용어가 있을 터였다. 적어도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를 갖게 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아들을 이해하게 될 것임은 분명했다. 개도 그렇지만, 인간에게도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집 아들가 부모가 차려주는 가장 좋은 식탁을 거절하는 이유가 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르는 후각의 예민함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는 뒤늦게라도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오해해서 미안하다, 아들아.


그날이 어서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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