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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9. 2022

할머니는 왜 자꾸 다른 사람 핑계를 대?

 배려는 언제 책임 회피가 되는가



"괜찮다"로 끝나는, 하지만 배려인지 떠보는 건지 모르겠는 어른들의 모호한 대답 사이에서 오랜 세월 시달려 온 나로서는 양가감정에 대해 그야말로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왜 말을 못 하는 거냐고~ 왜 꼭 애매하게 얘기해서 우리 자식들한테 선택권을 떠넘기냐고~~~ (시작하자마자 내가 급발진하는 걸 보면 정말 감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아주 가벼운 예를 하나 들면 이런 거다.


며칠 전. TV 홈쇼핑에서 티각을 사고 싶은데, 모바일 결제를 해야 싼데 할 줄을 모르니 대신 결제를 부탁한다는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그거 하나 얼마나 한다고, 기어이 은행으로 돈을 이체해 주시겠다는 걸 말리지 못하고(어머니는 자식에게도 뭐 하나 허투루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문을 넣어드렸다.


며칠 뒤 잘 받았다고 전화가 왔는데, 반응이 참, 애매모호했다. 맛은 있는데, 한 봉지에 너무 적게 들었다, 오자마자 벌써 세 봉지나 까먹었다, 연근이 맛있는데 역시나 비싸서 그런지 몇 개 들어 있질 않다, 판매 기간이 끝났는데 이 가격에 더 살 수가 있나?... 여기까지 듣고 있는데 자동으로 검색을 시작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을까. 나는 스피커로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인터넷에 검색을 때려보기 시작했고, 당연히 여기저기 판매 중인 같은 상품을 찾았다. 가격이 좀 비쌀 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것이 아니 팔릴 리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한 봉지당 2천 몇백 원 정도 하겠는데요, 어머니~ 연근만 들어 있는 거 한 상자 사보 낼까요?" 했을 때 어머니는 역시나 손사래를 치셨 거다.


"아니다 아니야. 한번 더 주문할 만큼은 아니고."

"맛이 없으셨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 가격에 어떻게 다시 사먹노."

"홈쇼핑 상품이 다 그렇죠 뭐. 홍보하려다 보니 싸게 판매하는 거고. 사실 이게 정가니까. 맛있으셨으면 하나 더 사서 보낼게요. 얼마 하지도 않는데."


하지만 결국 또 "괜찮다~"로 끝이 나고 말았다.  


누군가 시집와서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이 이중언어였다. 지난 명절도 딱 그랬다. 시댁에 내려가는 걸 당연히 생각하고 전화를 드리면, "내려올 거니?"라고 물어보셨다. 차가 막히고, 교통비 엄청 깨지고, 장거리 운전도 피곤할 테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예뻐하시던 손주도 사춘기 들어서며 딱히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올 거냐는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괜찮은데, 너네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오너라." 하셨다.


다른 옵션? 당연히 있었다. 이것저것 다 맘에 걸리면 어머니가 올라오시 되는 것 아니겠는가. 사춘기 아들이 안 그래도 대여섯 시간씩 걸려 할머니 집 가는 거 싫다고 며칠 전부터 '할머니가 올라오시면 안 돼?' 옵션을 열심히 어필하는 중이었다. 우리 집안은 몇 년 전부터 사정상 '며느리 집에서 자지 않기' 철칙이 생기는 바람에 한동안 계속 시댁에서만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선 '손주 찬스'가 필요했다. '할머니 사랑' 손주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방에서 할머니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고 난 아들이 마루에 나와 대뜸 나에게 이러는 거다.


"엄마, 할머니는 왜 자꾸 다른 사람 핑계를 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할머니 왈, 올라와서 집에서 함께 지내면 엄마가 힘들어서 안되고, 숙소를 따로 잡으면 아빠가 힘들어서 안된다"고 하셨다는 거다. 어머니는 시부모와 함께 명절을 보내려면 음식 준비하고 청소하고 수발들어야 하는 며느리를 배려한 것이고, 그렇다고 숙소를 하나 더 잡으면 쓸데없는 데 비용을 지불해야 할 아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손주 눈에는 할머니만 딱 눈감고 올라오면 모두 만족할 것 같은 결정 앞에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태도가 딱 남 탓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려가 손주 눈을 통해 책임 회피로 뒤바뀐 이 마법이 나는 너무 신기했다.


결국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를 끊고 나서 남편에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우리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오라시는데?" 했더니 남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느 때처럼 웃고 말았다.  


고속도로는 뻥 뚫리고, 운전하는 내내 모두 즐겁고, 명절이라는 부담감도 없이, 게다가 서로를 절절이 그리워해야 하는 마음까지. 그 완벽한 조합이 아니면 저어되는 마음. 내가  훼손되지 않는 이상적인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은. 그 완벽한 선택을 위해 결정을 미루던 방식 때문에 우리는 명절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얼마나 괴롭혔던가. 그러고 보니 일상의 모든 선택 앞에서도 컴퓨터 로직 마냥 "예, 아니요"로만 결정하길 바라는 남편의 기계적 태도도 이런 어머니의 미결정 상태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된 건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스멀스멀 올라왔다.


누군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부모에게 철딱서니 없는 자식이 되고 싶지 않고, 자식에게 부담 주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렇더라.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평범한  어른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찌 됐건, '며느리 집에서 자지 않기' 철칙이 세워졌던 몇 해 전부터 우리 집은 여자들끼리 조율하던 시댁에 관한 결정들이 조금씩 남편에게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남편도 지금쯤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이는 그 '간단한' 결정 안에도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와 조율이  얽혀 있는지. 몸소 겪어보며 남편도 '집안일'이 '바깥일'에 비해 결코 사소 일이 아님을 깨달아가는 중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내가 불완전한 나와 세상 이치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중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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