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못한다. 맞벌이할 때는 개념도 없었고, 싸울 힘도 없었다. 싸웠더래도 싸운 후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거나, 한 번만에 집안일에 대한 개념이 생길 리 없는 남편을 계속 길들이는 일에 먼저 진저리 쳐 아마 결과는 지금과 똑같았을 거다. 싸움의 근육이 없다. 어떤 의미에선 평화주의자고, 어떤 의미에서는 회피하는 사람이다.
맞벌이를 접고 나서는 당연히 모든 집안일이 내 일이 되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돈 벌어 오는 일을 접었으니 집안일을 내가 전담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집안에 쏟고 집안일의 수준은 훨씬 질이 높아져야 했다. 나도 남편과 똑같이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 알고 자랐고, 남편과 똑같이 내 방 청소 한번 해보지 않은 채 대학에 들어갔고, 그렇게 취직해 사회생활을 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어찌어찌 나는 다시 전통적인 엄마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다. 어차피 이게 내가 돌아와야 할 자리인 것 같기도 했다. 전업주부인 엄마의 모습은 내게 익숙한 여자의 자리였다. 두 가지를 다 못할 바에야,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건 아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고 생명을 건사하는 일이 어떻게 직장 일보다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가지를 남편과 함께 나눠서 하면 좋았겠지만, 그는 가부장 집안에서 자란 평범한 남자였고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여자였다. 둘 모두 개념이 없었다. 30년 동안 내가 쌓아온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훗날 내가 얼마나 후회하게 될 것인지도 몰랐다. 직업에 대한 개념 같은 게 내 안에서도 허약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머니 세대와 다름없이 전통적인 여자의 자리로 돌아왔고, 남편은 내가 그 많은 길을 돌아가는 동안 예전처럼 전통적인 남자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기회비용에 대해 특별히 분통이 터진 적은 없다. 회사를 관둘 때에는 맞벌이를 하며 집안 일도 하는 두 가지 일로도 너무 지쳐, 그저 한 가지 일만 하게 됐다는 것 자체로 안도했다. 하루 종일 어린 인간 둘의 뒤꽁무니를 좇아다니며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아주는 일 외에도, 사고 치면 뒤치다꺼리하고 이웃 엄마들의 살림살이와 교육 철학을 공유하며 24시간이 그저 빼곡하니 바빴다. 그리고 충분히 보상받았다. 이 작은 인간들이 내가 해준 밥을 먹고 하루하루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어디선가 이쁜 애교 짓을 배워와 엄마 엄마~ 남 좀 봐봐요, 하며 내 앞에서 원맨쇼를 올리고, 수영장에서 근육이 붙은 팔다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를 때. 유년을 두 번 사는 기쁨이 있었다. 24시간 자잘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자라고 성장하는 기쁨에 흡족했다.
하지만 사춘기. 하루 종일 내 수고와 돌봄을 필요로 했던 아이들은 이제 없다. 저마다 꽉 채워진 자기 스케줄로 바쁘고, 엄마보다 친구가 더 좋았다. 이제 좀 자신에게 관심 꺼주길 바란다는 걸, 아들은 매일매일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움을 주는 부모로라도 남고 싶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부모에게 묻지 않았다. SNS 속 또래 유령들이 다 알려주었다.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 간식을 만들어뒀다가 놀이터로, 친구 생파로, 수영장으로 데리고 다니던 스케줄이 이제 자기들끼리 학원으로, 에버랜드로, 노래방을 가는 수순으로 채워졌다. 마땅히 아이가 독립하며 겪게 되는 과정이었기에 내가 막아서도 안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24시간 나를 꽉 채웠던 관심의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비자발적 실업자가 되었다.
독서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도 달라졌다.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 나는 집안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동안 우리는 저평가된 집안일과 양육의 중요함에 대해 설파하지 않았나. 아이들과 남편이 바깥일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여자들이 아무 걱정 없이 집안일을 편안하게 잘 운영한 덕분이 아니겠냐며, 정서적 안정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교육의 질을 위해선 역시 돈이 최고며, 특목고나 유학을 보내려면 얼마나 필요한지, 주식과 부동산으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이동했다. 사회생활에서 밀려난 남편들이 생겨나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여자들의 필요도 발생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주도적으로 삶을 산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남편은 늘 한결같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기득권자여서 굳이 삶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없었던 걸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별 불편함이 없으니까. 내가 맞벌이를 하든 말든, 남편은 자기가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자신의 틀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남녀 모두 맞벌이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한 번도 집안 일로 진입하지 않았다. 결국 그 모든 구조를 견디지 못한 건 나고, 치열하게 싸우지 못한 것도 나고, 그래서 바깥일에서 집안일로, 지금 다시 바깥일로 진출하려고 애쓰는 것도 나다.
내가 다시 알바를 시작하자, 남편이 말했다.
"학원 하나 차려줄 테니 너도 제대로 한번 해봐."
이 말에 나는 마음이 착잡하다. 얼마 전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도 이 회사에서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5년이나 버틸까? 그러더니, 회사를 그만두면 캠핑장이나 자전거 수리점 같은 걸 하며 자기는 계속 일할 거라고 했다. 그는 2년 전 과로로 쓰러졌고, 메니에르 병을 얻었고 1달 전 다시 재발했다. 나는 늘 내가 남편이었다면 쓰러져 죽어도 벌써 여러 번 죽었을 거라고 주변에 얘기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저녁에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미리 알려주지 못하는 남자다. 그의 24시간은 늘 업무로 가득 차 있고, 늘 업무가 일순위라서 집에서 먹는 저녁을 약속하지 못한다. 그가 이제 더 버틸 수 없겠다고 한 말은 그러니 진심이 아닐 리 없었다.
나를 학원에 소개해준 친구는 3년 정도 그렇게 알바를 하다가얼마 전 자기 학원을 차렸다. 남편이 전폭적으로 지지한 덕분이라고 했다. 20년 동안 내내 전업주부로 있던 그녀에게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 쉬울 리 없었다. 생각해 보라. 20년 동안 사무직 일을 하던 남자를 어느 날 물류나 영업직으로 전환배치해서 신입사원에게나 걸맞은 일을 배정했다고. 아마 안면에 철판은 깔아도 얼마 지나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학원에 딱 맞는 조건의 건물이 나오자 서둘러 계약을 하고 리모델링을 하고 간판 디자인을 고르고 집기를 주문하는 내내 내 친구는 매일 저녁 한 번도 울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기둥서방론 알아요? 옛날에 그 셔터맨을 요즘은 기둥서방이라고 부른다네."
인생 후반전에 새로운 인생에 한번 도전해 보고자 하는 자신의 뜻에 선뜻 자금을 대고 지지를 보내준 남편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아내에게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의 짐을 미리 짐 지운 남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여자들에게 일종의 독립과 도전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그 자체에 대해 딱히 어떤 비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왜 결혼 후 내내 남편은 한 번도 변하지 않는 동안 나는 계속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지금 생각해 보는 중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남편에게 그가 늘 나보다 '지나치게' 더 열심히 살고 있다는 부채감이 있다는 것이다. 맞벌이하던 당시. 내가 제발 10시까지만 들어와 달라고, 아이 잠만이라도 좀 재워주면 안되냐고 부탁할 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밤늦게 집에 운전하고 들어오면서 내가 무슨 생각 하는 줄 아니? 이렇게 졸음운전하고 가다가 어느 순간 나무에 처박혀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도 매일 그런 생각하며 다녀."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는 부부는 아니지만, 이런 말을 면피용으로 하는 부부도 아니다.
그는 늘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얼마나 더 버틸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 말도 진심이다.
그러니 나도 어쩌면 친구처럼 곧 학원을 차리게 될 지도 몰랐다. 그게 내가 결혼 후 변하는 동안 남편은 한번도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