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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02. 2022

왜 학원이냐면

우린 실패하면 돌아갈 곳이 없거든



그렇다면 학원엘 안보내면 되지 않나. 공부 안 하는 놈은 어차피 안 할 거니 보내지 말고, 공부할 놈은 어차피 학원에 가지 않아도 공부할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그 돈 모아 집 한 채 얻고 노후 대책도 세우면 좋지 않겠냐고. 그런 뻔한 소릴 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맞벌이할 때 아기 봐주시러 우리 집에 출근하시는 이모님이 계셨다. 한때는 남편과 알콩달콩 세탁소를 운영하며 아들 하나 키우고 사셨는데, 남편이 어느 순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리면서 생활이 한쪽으로 훅, 기울어 생활전선에 뛰어드신 케이스다. 아이들도 깔끔하게 잘 봐주셨지만 손이 얼마나 크신지, 얼마 되지 않는 월급 받아 자기 집 건사하기도 모자랄 텐데, 제철 음식이라도 주문할라치면 늘 우리 것까지 챙기시는 후덕한 분이셨다. 그런 이모님을 두고 어머니께서는 늘 낭비가 심하다고 타박하곤 하셨지만, 나는 이모님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녀는 한 푼 두 푼 돈을 모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 돈 모으면 뭐하겠나. 어느 날 남편이 술 한판 마셔버리고, 치료 감호소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후딱 없어질 것을. 어머니는 그녀가 이렇게 집한 채 없이 살고 있는 게 마치 그녀의 낭비벽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불안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 같은 걸 읽었다.


삶이 불안정하고 기반이 없으면, 모을 이유가 없어진다. 미래를 기약한다는 것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본다는 것도 어느 정도 삶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처음 공부 학원에 아이를 밀어 넣을 때 나라고 왜 고민하지 않았을까. 당시만 해도 내게 학원은 엄마들의 불안으로 장사하고, 아이들의 재능을 재빨리 연소시키는 필요악에 다름없었다. 초반엔 다른 이들처럼 그 불안에 충동질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안이 어찌 근거 없이 일어날까. 불안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자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온 필요악이자,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뱀에 대한 불안은 우리 유전자에 뱀을 보면 피하라는 DNA를 심어놓았고, 그 덕에 뱀을 보자마자 불안을 감지한 우리의 조상은 뱀을 보며 달아났다. 덕분에 후손인 우리가 지금 대를 이어 살아남았다. 불안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무시무시한 거대 파충류와 공룡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예전에 멸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이 그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일 일인가.


일단 내 주변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 중에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애들 없었다. 축구 같은 거야 꼭 클럽에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학교 운동장에만 가도 같이 공 차줄 아이가 널려 있었다. 하지만 공부 학원은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처럼 입시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학교 공부만으로 대학에 간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와서도 자기 전까지 밥먹는 시간만 빼고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 시험 문제가 요구하는 그토록 많 지식을 모두 습득하기란 불가능하다. 십년 전공 분야만 판 학교수도 못푸는 문제를 고등학생에게 요구하는 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니던가.  


공교육에 대한 회의도 당연히 있었다. 두 아이 학교에 보내보니 초등 6학년 내내 솔직히 좋은 선생님을 만날 확률은 6명에 2명 정도? '좋은'이란 단어를 어찌 한 두 가지로 기준할 수 있을까 마는, 6년 내내 아이도 좋아하고 나도 만족한 선생님이 2명 정도밖에 안 됐다. 물론 둘째 아이는 4학년 때 만난 선생님이 너무 좋아 장래희망이 선생님이 된 케이스이긴 하나, 좋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보다는 이상한 선생님에 대한 체념이 더 강게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학교에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배워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공부만 배워오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쌍방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겐 선생님이 전부인데 솔직히 적절한 권위와 실력과 인격 모두 갖춘 선생님을 만난다는 건 한마디로 에 가까웠다. 이상한 학가 많은 만큼 이상한 선생님도 많았다. 한 학년 걸러, 한 반 걸러 선생님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일이 매해 벌어졌지만, 학교 또한 웬만한 일로 선생님을 징계할 수 없다는 현실도 체득했다. 지속적인 태만이나 막말이 의심되는 경우라도 담임이 바뀌는 일은 드물었고, 어느 해 그런 담임을 만난 아이들은 그 폐해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체득하며 1년을 버텨야 했다. (물론 빌런 교사 하나가 나머지 학생들을 똘똘 뭉치게는 하더라) 


그에 비하면 학원은? 가차 없다. 선생님이 맘에 안 들면 바로 다음 날로 아이는 등원하지 않고 학부모는 카드를 긁지 않는다. 누가 내는지도 모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와 다르다. 즉각적인 평가와 돈이 오가는 곳이다. 그러니 생존 경쟁을 한다. 경쟁 학원과 공부법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 귀에 쏙쏙 꽂힐 수 있을지 고민한다. 서비스 질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나 자신 학원 선생님이 되어 학원이란 사회에 나와보니, 웃프게도 이곳에 '내 아이는 어찌하지 못한' 엄마 선생님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집에서 엄마 말은 안 듣는 애들, 집에선 핸드폰만 보는 애들 학원에 와선 책을 읽다. 자기 주도 학습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한 문장 읽기와 문해력을 설파하는 선생님도, 제 아이에게는 먹히지 않던 비법이 다른 아이에게는 먹혔다. 다른 아이 가르치고 번 돈으로 내 아이 학원비를 벌고 있었다. "결국 우리 서로 품앗이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마주 보며 자조했다.  


내가 아이 낳고 진입한 세상은 이미 학원 = 대학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새로운 도전이란 건 실패해도 돌아갈 곳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카드나 겨우 메꾸며 사는, 우리처럼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이들에게 새로운 시도는 너무 위험하다. 우리는 만의 하나 천운을 바라기 보단 안전한 인생을 원한다. 그래서 매번 이렇게 살고 있는 거라고 누가 뭐라 한들, 나는 그저 죽기 전에 이 작은 지구 한 귀퉁이에 내 몸 편히 뉘일 집   정도 갖고 살다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을 뿐인데 지금으로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불안할 뿐이고, 그래서 학원에라도 보는 것이다.


아파트 대출받아 유학 보낼 여력도 안되고, 번듯한 부동산 하나 물려줄 수 없는 부모가 그거라고 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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