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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2. 2022

만능 문제해결사가 감정을 해결하는 방식

 새턴의 그림자 아래에서

만능  감정 다루는 방식  



나는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고, 남편은 예배 영상 송출을 한다. 우리가 최근 몇 년간 교회에서 맡고 있는 봉사다. 남편은 교인들이 모이지 못하던 코로나19 기간 동안 교회의 영상 장비 세팅을 했다. 같은 기간 총무를 함께 맡으면서 주말에도 쉬는 법 없이 교회 관련 크고 작은 발품을 팔았다. 그 기간 중 남편은 메니에르를 얻었고, 나는 그가 병을 얻은 데 교회일이 조금 영향이 있지 않았나 의심하는 중이었다.


몇 달 전 교회에 가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그날도 내 눈에는 이제 충분해 보이는 음향과 영상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추가로 부품과 케이블을 사들이고 교체하는 일로 골똘하고 있었다.


"당신. 솔직히 말해 봐. 영상 장비 세팅하는 거 재밌지?"

"그런 게 어딨냐.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전혀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그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한단 말이야?"

"예배 영상은 찍어야 되고, 영상 장비 아는 사람은 없고, 하겠다고 아무도 안나서고, 내가 할 수 있고. 그러니까 그냥 하는 거야."


(남편에게 연애에 대해 물었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 "당신 왜 그때 나한테 대시했어?

남편 : "연애는 하고 싶고, 딱히 만나는 사람은 없고, 그때 네가 거기 있었고. 그러니까 너한테 대시했지.")


각설하고.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보통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어느 정도 관심이나 흥미가 있어야 하거든.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은 사람이 있거나 내가 잘 해내지 못할 거 같으면 나서지 않기도 하고. 당신은 근데 호불호가 없어."

"그럼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못한다고 해?"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No를 안 하니까, 자꾸 당신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 거 같아서 그러는 거지~."


남편은 못한다는 말을 싫어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 남편은 영업 담당인데, 불량률이 너무 많이 발생하면 몇 날 며칠 공장으로 달려가 생산 라인을 지켜보고 있다. 원인을 찾아내서 제조 공정 과정을 재설계한다. 어느 날은 연구소에 가서 연구원들과 장비 설계도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거래처가 원하는 오차범위로 좁히기 위해 시험 적용을 반복하날밤을 샌다. 해외 거래처의 단가와 경영진이 생각하는 단가의 갭을 현실적으로 조율하기 위해 끊임없이 메일을 주고받는다. 모든 부서의 모든 단계에 개입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이에서 불평과 이견을 중재하는 CS 업무 또한 남편의 일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남편은 무능력하다는 소리도 싫어한다. 아니,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않는 자신을 스스로 못 견뎌한다는 편이 더 맞겠다. 남에게 지적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 소리 듣기 싫어 쪽잠 자며 새벽에 일어나 해외업체와 콘퍼런스 콜을 하고, 대표가 출근하기 전에 이메일을 보내 놓는다. 배배 꼬이고 답이 없을 것 같던 일도 남편이 개입하면 빠른 시간 안에 획기적 방법이든 차선의 대책이든 일단 매듭이 지어진다. 그러니 중소기업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업무가 모두 그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 그는 만능 해결사니까.


'새턴의 그림자 아래서 Under Saturn's Shadow'라는 원제를 가진 <남자로 산다는 것>이란 책에 보면 남자들은 평생 8가지 그늘에 눌려 사는데, 그중 첫 번째가 '성역할에 따른 기대'라고 한다. 남자들은 여자들 보다 더 역할과 기대, 경쟁과 적개심, 더 나은 자질과 역량에 대한 모욕과 폄하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서로의 수치심을 자극하며, 적을 내는 구도 속에 스스로를 자리매긴다고 한다. 


은 로마 신화에서는 사투르누스, 그리스 신화에서는 크로노스라 불리는 농업의 신으로, 생식과 문명 또한 관장하는 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라노스, 어머니는 가이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를 넘어설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다시 아내 뱃속으로 밀어 넣은 폭군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새턴 또한 아버지의 두려움을 그대로 이어받아 아내 레아가 아이를 낳는 족족 모두 잡아먹었다. 그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제우스 덕택에 그리스 신들의 계보는 간신히 잇게 되지만... 부모와 자식 간 피비린내 나는 권력과 암투, 가족 학살극이 그리스 최고 신 제우스 집안의 내력이었다.  


책의 저자는 이렇게 남성의 세계를 뼛속부터 권력 콤플렉스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권력과 대결 구도에서 오는 공포와 방어기제 또한 필연적으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사실 경쟁이야 인류 진화의 오랜 기제이기도 하니 여성에 비해 남성이 더 특별할 것이 없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은 불안과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에게 털어놓는 반면, 남성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중고를 겪게 된다고 한다.


일례로 여자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데 익숙하다. 서로에게 자신의 치부나 약점을 드러내는 일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남편 뒷담도 잘한다. 어젯밤 또 만취해 들어온 남편 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타던 일도 함께 터놓고 얘기 하다 보면 문제는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우리 집 남편만 그런 건 아니네~ 하는 공감과 위안을 얻는다. 그렇다. 여자들은 수다를 통해 매일매일 일상의 불안을 치유받는 마법의 시간을 경험한다.  


남자들은 어떤가. 평상시 차 마시며 자기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조차 드물다. 내면이 없다. 카페에 앉아 친구에게 자신의 말못할 고민을 깊이있게 토로하는 남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술 한잔이나 빌려야 그나마 찔끔, 몇 마디를 꺼내 보지만, 조금 내밀한 이야기로 들어가려다 보면 어느 순간 농담 반 진담 반 혀가 꼬이고, 생각도 저만치 어허야 둥둥~ 떠내려가기 마련. 남자들은 아내의 약점조차 자신의 치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서로에게 쉬이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다. 타인이나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킬지도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약한 모습은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는다.


결혼하고 나서 나는 남편이 자신의 약점은커녕,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별로 보지 못했다. 남편은 부부 싸움을 할 때조차도 언성이 높아지거나 이성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조그마한 일에도 먼저 목소리부터 떨고 톤은 날카로워지는데, 그러다 보면 격정에 휩쓸려 횡설수설하다 어느 순간 나 혼자 극단까지 치닫고 끝나기 일쑤였다. 싸움을 하고 나면 늘 홀로 벽치기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감정적으로 함께 치닫지 않는 남편이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남편은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안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회피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에는 그 후로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남자로 산다는 것> 제임스 홀리스 저, 더퀘스트.

서문. 새턴의 그림자 안에서

1. 남자가 물려받은 것 : 허상, 역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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