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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1. 2022

거인, 당신의 이름은?

톱니바퀴 밖에서 당신은 얼마나 허약한 개인인지



인터넷 서점을 그만 두기 직전, 내가 마지막으로 맡은 행사가 출판사 간담회였다. 출판사 대표와 영업 담당자를 모시고 한 해 동안의 감사를 표하고, 또 다른 한해를 기약하는 자리. 갓 신임 팀장을 달고 전사 이벤트 몇 번을 올린 게 전부인 내겐 처음 담당해보는 행사인 데다, 나는 그 나이 먹도록 많은 사람들 앞에 서본 경험 자체가 전무했다. 팀원들에게 대상 출판사 리스트와 행사 참가 여부를 지시하고, 식순을 짜고, 인사말을 작성하는 동안 나는 분명 여러번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사 당일. 나는 전혀 떨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어디 행사장 가서 질문 하나 할 때도 목소리부터 떨리는 사람인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희한하다. 일제히 나를 쳐다보던 대표들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며 감사와 소회를 전했고, 그중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출판사 대표 하나가 유독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장면이 아직도 기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대기업 임원이나 대규모 행사 총책임자처럼 큰 직함을 달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다른 나라 사람 보듯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애송이 팀장이었던 내가 당시 나름 큰 행사를 치를 수 있었던 건, 그 행사가 나 혼자 치르는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매해 해오던 행사는 일정 정도의 패턴을 가지고 돌아간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잘 감당해 주면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들처럼 내가 맡은 사회와 인사말 하나만 잘 담당하면 되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거대한 톱니바퀴가 잘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기업과 사회 모두 이런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일개 '나'라는 개인 하나가 대단히 큰 획을 그을 일도, 치명적인 실책을 범할 일도 없었던 거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것도,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지 업무에 대한 어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도서 분야 담당 MD 시절에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은 그저 누구라도 3개월만 열심히 익히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 서점은 가파르진 않아도 여전히 성장세였고, 업계 1위였기 때문에 매출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가격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경쟁사의 신규사업이나 기획에 맞춰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추면, 연말에 얼추 목표가 달성되고 인센티브를 받았다. 


팀장이 되면서 정작 가장 큰 난관은 구태의연한 루틴을 견디는 일이었다. 결산과 사은 이벤트, 독자 참여 이벤트, 사회 공헌 이벤트 모두 매출 이벤트에 붙인 허울 좋은 이름일 뿐. 그러니 매출인 듯 매출 아닌 이벤트를 매번 올려야 하는 지겨움만 버틴다면, 감당 못할 자리는 아니었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바퀴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계속 굴러갈 것이므로. 아니, 굴러가야 하므로. 그게 자본주의의 생리이자 동력이므로.  


몇 해 전부터 친구의 남편들도 하나 둘 톱니바퀴에서 굴러 나와 자영업자가 되었다. 남편들은 말했다. 대기업에서 소모품처럼 쓰이다가 결국은 버려질 거라고, 더 늦기 전에 자기 인생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친구는 그런 남편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나름대로 사회에서 자기 자리 하나 정도는 야무지게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던가. 믿음직한 남편이었다. 그러니 남편의 새 출발을 겉으로나마 묵묵히 지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남편 중에서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제2의 인생을 구축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세계가 원래 그렇다. 안에 있을 때는 톱니바퀴가 얼마나 거대한지 잘 모른다. 그저 일개 부품인 자신의 비루함만 보인다. 개인이 돼 봐야 안다. 내가 이 거대한 톱니바퀴의 아주 작은 부품으로 붙어 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러 왔는지. 그 비용을 치르느라 월급은 그렇게 쥐꼬리 만했지만, 그 타이틀은 인간관계에서 크고 작은 권력과 지위와 품위로 작용하고 있었다. 개인 하나는 얼마나 허약한지. 톱니바퀴 안에서나 우리는 잠시 거인이 될 수 있었다. 


점점 더 직책과 타이틀을 벗고, 남편과 자식도 벗고, 홀로 설 일만이 남아 있다. 모든 것을 훌훌 벗고 맨몸으로 신 앞에 섰을 때. 마지막까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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