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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5. 2022

남자가 부실하면 여자가 성공하는 공식

그 시절 여자들을 사회로 내몰던 선택압



아버지가 40대 후반쯤 회사를 때려치셨으니, 남자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적일 때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어진 셈이다. 부모님이 그 시절을 어떻게 삼 남매 다 대학 보내고 꾸려오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5인 가족이 한 달에 최소 인당 100만 원을 쓴다 하면, 1년이면 6천만 원이고 2년이면 1억이 훌쩍 넘는데, 그렇다고 인간이 먹고 입기만 하는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는 그 넓은 땅은 그렇게 5인 가족의 마지막 생활비가 되었다. 


가끔 물려받은 부동산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회사를 때려치셨을까, 생각한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과감히 톱니바퀴를 떨치고 나와 나름의 야망을 불태워 보려 하셨겠지. 끝없는 평가와 경쟁으로 점철된 그곳에 매달려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과적으로야 할아버지의 유산을 야금야금 팔아치우며 기생하는 형상이 되고 말았지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여자들의 사회 진출에 대해 고민하면서 내가 어머니 세대에 대해 갖게 된 공식 하나가 있다. 


남자가 부실하면, 여자가 성공한다. 


요즘 한창 짤로 도는 김창옥 교수의 '노벨상 수상자 아버지들의 공통점'을 떠올리면 된다. (아버지의 부재가 아들을 훌륭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부재가 아내의 성공의 요소로 작용한다. 사별이든,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든. 실제로 내 어머니 세대를 둘러보니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자들에게는 '남편의 부재'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편의 공백과 경제적인 필요가 당장 여자들을 사회로 내모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누군들 약육강식의 전쟁터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겠는가. 게다가 당시만 해도 사회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늘 '집안일'로 규정되어 있던 여자들에겐 '바깥일'은 낯섦과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어떻게든 살만 한 정도면 절대 뛰어들지 않는다. 당장 내 자식 굶어 죽을 판국이니 궂은일 아닌 일 따질 여유도 없는 거지. 생존본능과 내 자식을 지켜야 내야 한다는 위대한 모성은 그 시절 가장 절박한 생존 능력이 되었다.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이 경쟁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남편의 부재가 여자들을 사회로 진출하게 한 가장 강력한 선택압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계속 내 어머니에게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가 가장 구실을 못하게 된 그때부터, 어머니 또래 친구들이 어쩔 수 없이 사회로 떠밀려 나가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 왜 내 어머니는 여전히 집안에 남아 있었을까. 우리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알뜰하고 싹싹하고 주변에 잘 베풀기로 둘째라 하면 서러울 여자다. 우리는 늘 엄마가 어디 자그마한 꽃집이라도 차렸다면 지금쯤 전국 체인망을 가진 꽃집계의 삼성가를 이뤘을 거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흔한 말로 집에서 썩히긴 아까운 재주였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의 부재가 있었다. 아니 곧이어 어머니(외할머니)도 재가를 하게 되니 어쩌면 고아와 다름없는 처지.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친정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딸 셋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다른 집으로 재가를 가셨는데, 그러다보니 남은 자매들의 고생은 불 보듯 뻔했다. 그 시절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다행히 어머니는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진 않으셨다고 했다. 대신 병원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지금으로 치면 간호조무사 생활을 하셨다. 


비록 환자들의 피고름을 닦아내고 환자복을 삶고 병원의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해야 하는 일이지만, 어머니는 저녁에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만큼 열심이 있었다. 예쁘고 영민했고 생활력까지 있었던 어머니. 그 시절 일하며 공부까지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어머니에게 일종의 자부심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이런 어머니를 어르신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어느 날 교회 장로님의 중재로 아버지를 소개받은 어머니는 그렇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부잣집 며느리가 되었다.


결혼하기 전, 어머니에게도 물론 다른 인생을 살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정식으로 간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어머니에게도 한때 젊은이다운 야망이 왜 없었을까. 대구 어딘가로 원서를 내기만 하면 되는, 결정적으로 방해되는 조건도 없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고심 끝에 어머니는 결국 원서를 내지 못했다. 


대체 왜? 어느 날 내가 물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자신이 없었어. 잘 해낼 자신이." 


당장 먹여 살려야 할 군식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 극심하게 반대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자신이 없어서'가 이유의 전부라고? 사회적 편견이 무서워서, 아님 아들이 아니라 딸이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도 아닌, 고작 '자신이 없어서'가 그 이유라고? 그리고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며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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