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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5. 2022

상상력을 자극할 어떤 것이 빠진 식탁

지지받아 보지 못한 마음의 상상력 부재



사회적으로 진출할 기회 앞에서 그때 어머니를 굴복시킨 것. 경제력을 상실한 가장의 무능력 앞에서도 그때 내 어머니를 집 밖으로 내몰지 못한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낮은 자기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절대 사소하지 않았다. 잘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자기 불신과, 낯선 세상에 대한 형체 없는 두려움. 그건 몇 년 전부터 후반전을 준비하며 나도 나 자신에게 끈덕지게 되묻던 질문이 아닌가.


버지니아 울프의 그 유명한 소설 <자기만의 방>에 보면, 가상의 남자 대학과 여자 대학이 나온다. 때는 만찬이 펼쳐지고 있는 어느 저녁 식탁. 크고 화려한 꽃이 가득하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 사이로 머리에 쟁반을 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식탁 위엔 하얀 테이블 보 위로 크림에 덮여 나온 얼룩덜룩한 넙치, 다양한 소스와 샐러드를 곁들인 자고새 고기, 장미 봉오리처럼 촉촉한 양배추, 그리고 노란색과 진홍색으로 빛나며 비워졌다 채워지길 반복하는 포도주가 있다. 그것은 '등뼈의 절반쯤 내려간 곳, 영혼이 머무는 곳'의 불을 밝힐 만큼 풍족한 남자 대학 식탁의 모습이다.


반면, 아무런 반짝임도 느껴지지 않는 소박한 여자 대학의 저녁 만찬. 식탁엔 접시 바닥의 무늬가 들여다 보일 정도로 묽은 고깃국, 시들어 구부러진 양배추, 퍽퍽한 비스킷이 놓여 있다. 그 흔한 포도주 한잔 없이. 물론 양도 충분했고 석탄 광부들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식사였지만, '인간이라는 육체는 실상 마음과 몸, 두뇌가 함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저녁식사로는 사색을 잘할 수도, 사랑은 커녕 편히 잠에 들기 조차 어렵다. 한마디로 '상상력을 자극할 어떤 것'이 빠진 식탁. 그것이 여자들의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가상의 남자 대학과 여자 대학이 가진 서로 다른 식탁의 풍경을 통해 19세 말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추적한다. 귀족과 재력가들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오랜 전통과 품위를 유지하며 이어져온 남자 대학과, 이제 간신히 읍소하여 구색만 갖춘 여자 대학. 그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우리에게 동력을 제공해 주는 효용으로서의 기능 만이 아닌, 그것 자체로 어떤 내막을 들려주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하지만 매일매일 경험하는 식탁의 차이가 오래도록 이 사회에서 기득권자로 누려온 남자들의 세계와 여자들의 세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음식을 둘러싼 이런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가부장 세계에서 가뜩이나 얼어붙은 여자들을 어떻게 더 주눅 들게 만드는지, 여자들의 상상력을 어떤 방식으로 죄이고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지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가상의 시턴 부인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묻는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었을까요?


1870년대 당시 평균치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시턴 부인은 목사인 남편에게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아주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어린 시절 누구보다 행복한 기억을 선사해주었던 자상한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다른 걸 생각해 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약 시턴 부인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대신 사업계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다시 상상의 회로를 돌린다. 시턴 부인과 그녀의 부류들이 열다섯 살의 나이에 결혼 대신 실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더라면? '인조 실크 제조업자가 되었거나 증권거래소의 실력자가 되었더라면, 그녀가 이 펀엄에 2만이나 3만 파운드를 기증했더라면, 우리는 오늘 밤 안락하게 앉아 있을 것이고, 고고학, 식물학, 인류학, 물리학 원자의 성격, 수학, 천문학, 상대성 이론, 지리학 등의 주제로 대화했을 겁니다.'(42p)


그랬더라면, 그들은 흔쾌히 여자들을 위한 대학에 후원을 하고 장학금을 쾌척할 수 있었을까. 반박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당시 여자들에게는 번 돈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녀들의 돈은 '남편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남자 대학 장학 기금이나 연구원 기금으로 기부하는 데 쓰'였을 것이라는 것.


한 여자가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 재산이 여자들을 위해 쓰이지 못할 때, 그 물질적 가난은 우리 여자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불과 150년 전 여자들의 이야기는 조금의 결만 달리했지 지금도 그대로 내 어머니와 나에게 공명되었다. 결혼 전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볼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걸 선택하지 못했다. 단지 '잘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자기 확신과 두려움' 때문에. 나 역시 남편과 똑같이 배우고 사회로 진출했지만 아이를 낳고 집안에 들어앉으며 경제적 독립은커녕, 자식에게 모두 올인하며 사는 다시 전통적인 어머니 자리로 돌아왔다. 그 어디에도 '나'를 위한 기획과 전망은 없었다. 그리고 그 옛날 버지니아 울프와 내 어머니와 나의 삶을 관통하는 그 이면에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지지받아 보지 못한 마음이 머물게 되는 상상력의 부재.


나는 없고 모두 우리로 존재하던 시대에, 특히나 남성의 조력자와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돌보는 엄마의 자리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바깥으로 나가 오롯이 나만의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과 상상력이 부재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 꿈틀대던 화두가 시대를 거슬러 한때 모든 여성들 앞에 놓인 공통의 과제였으며, 그들 또한 나와 같은 고민으로 분투하며 한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 앞에 지금, 묘한 위로를 받고 있는 중이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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