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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7. 2022

상담 받을 걸 그랬나

아들에게 향하던 시선을 나에게 돌리던 순간



오늘 아침. 아빠 따라 연탄 봉사를 나선 아들이 카톡을 보내왔다.










메시지가 좀 깨져서 안 보이는데, 요는, 사랑의 연탄 봉사 날 눈이 와서 기쁘다~라는 주최 측 담당자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아들 눈에는 가뜩이나 추운 겨울에 눈까지 왔으니 봉사하는 동안 얼어 죽을 게 분명한데, '눈이 오다' 와 '축복'을 동급으로 놓은 이 문장이 당최 이해가 안 갔던 거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답글을 보냈다.


원래 눈은 축복의 상징! 봉사와 섬김 정신이 가득한 사람들 눈에는...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모든 게 축복인 거지. 아들아~ 네가 가니 마니 했던 연탄 봉사를 따라나서 이 아침, 엄마도 무척 행복하도다!


아들은 1주일 전 연말 연탄 봉사할 사람이 모자라다는 교회 요청에 응해 마지못해 봉사를 자청한 상황. 하지만 며칠 전 엄마와 동생은 같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안 가도 되는 줄 몰랐지, 하며.


나는 어차피 자원해서 하는 거니 가기 싫어졌으면 취소하면 되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어제저녁 때만 해도 남편은 아들이 또 약속을 취소했다는 사실을 허탈한 목소리로 내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기적적으로 아들이 다시 가도 되냐며, 근데, 끝나고 컴퓨터를 고치러 다녀오면 안 되냐며 아빠에게 정식으로 부탁을 했다.  


아침에 오랜만에 속에 입을 아들의 발열내복과 장갑을 찾아주며 나는 기뻤다.


아들이 마지못해 떠안은 우리 요청에, 여느 때처럼 간단히 취소해도 그만인 일을, 돌이켜 지켜주었다는 사실에. 그 작지만 소중한, 이전과 다른 아들의 결정에 나는 너무 행복했다. 그게 컴퓨터를 고치기 위한 소기의 목적이 있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그건 좋은 선택이니까. 


그러고 보니 아들은 얼마 전 문 앞에 내놓은 재활용 쓰레기도 부탁하기 전에 혼자 다 갖다 버리고, 오늘 아침엔!! 라면 대신 그 하찮은 미역국에 밥까지 말아 드셨다. 정말 완벽한 아침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사춘기가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아들이 사춘기 때문에 잠시 미친 건지, 행동이나 심리 같은 발달 문제가 있는 건지 매일 헷갈렸다. 그때 바로 심리 검사를 받았거나 상담실 문을 두드렸으면 오히려 말끔했을 일을, 지금도 조금 후회한다. 혹시 내가 회피했던 건가, 싶어서, 자주 되묻곤 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아들이 어떤 때는 참을 만하고 어떤 때는 극도로 내 불안을 조장하는 게, 그게 아들 때문인지 엄마인 나 때문인지 판단이 잘 안 서지 않았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실제로 학교 위클래스를 통해 지역 청소년 상담 센터에 문의를 했을 때도 학생 상담 전 부모 문진 때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다. 내가 아들의 게임과 핸드폰 중독이 심히 의심된다고 했더니 그때 딱 두 가지를 물어보셨다.


"학교는 다니나요?"

"네? 학교요? 당연히 다니죠."

"그럼 밥은요? 잘 먹나요?"

"물론. 라면을 주식으로 하긴 하지만 밥도 잘 먹죠."

"흠... 그럼 중독이라고 보기엔 좀..."

"도대체 중독의 기준이 뭔데요?"

"중독이라고 하는 건요, 일단 그 행동을 자제할 수 없어서 그 행동이 일상생활에 지속적으로 지장을 주는 상태를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게임을 더 하고 싶어서 학교를 못 가게 되거나 밥을 걸러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게임에 빠져 있다거나 하는."


흠. 그러고 보니 아들의 상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학교만 다녀오면 '공부'와는 담을 쌓았을 뿐. 학교를 안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가끔 지각을 할 것 같으면 청소하기 싫어 병원 찬스를 쓰긴 해도, 학교에 가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급식충에 잠충에 가깝긴 해도 다른 아이들 수업을 방해하거나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뭐 공부 스트레스가 없으니 학교에 가는 게 싫을 리 없었다? 까지 하면 너무 나간 거겠지. 암튼, 정말 헷갈리기 그지 없는 기준이었다. 


물론 학교 외적인 문제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아들은 예전부터도 학교나 친구 문제로는 아무런 지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집에만 오면 난장판이 되는 것이 계속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이건 순전히 집안에서 엄마인 나와 관련된 문제였네? 심지어 아들은 사춘기를 지내며 자기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고 있었는데, 엄마인 나만 허둥지둥 안달복달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 라인 없고 바운더리 없는 나만 아들의 자극에 포지션을 세우지 못해 끌려 다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들이 내 불안을 알아봐주지 않고 있다고 아들이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담이 필요한 건 아들이 아니라, 나일지도 몰랐다.(소름)


상담이 필요한 기준에 대해 내가 다시 상담사인 후배에게 물었을 때, 후배 또한 이렇게 말했다. 

"명확한 기준은 따로 없어요. 당사자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문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데 서로 합의가 안되고, 그래서 둘 중에 한 사람이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때 상담사를 통해 도움을 받는 거죠."


후배는 상담사가 해결사가 아님도 누차 강조했다. 문제도, 방식도, 해법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고 상담사는 내담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입장이라는 것. 절대 답을 던져주는 관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에서 가장 서로에 대해 잘못 기대하고 자칫 실수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상담사에게 '정답'을 갈구하는 방식이라고. 하지만 정답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다고. 오직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는 걸 재차 짚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들의 카톡 메시지를 받으며... 나는 내가 그렇게 잘못된 길을 걸어온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느 순간 아들에게 집중했던 눈을 돌려 나에게 집중했고, 아들에게 갈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때는 그저 아들은 이제 타인이고, 내가 타인을 어찌할 도리는 없기에 '나' 자신이나 좀 바꿔보자, 했던 건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결국 나를 살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들도 살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순간에서든 '나'가 먼저 있어야, 남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들은 그렇게 서서히 '남'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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