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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04. 2020

25. 소년과 소녀

당신이 아들을 못 놓겠는 이유  

당신은 로체스터 부인이오. 젊은 로체스터 부인,
페어팩스 로체스터의 소녀 같은 신부.


청혼을 받은 다음 날. 제인은 거울을 보며 늘 못생겼다고 생각하던 자신의 얼굴이 예뻐 보인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를 향한 로체스터의 호들갑스러운 찬사도 그칠 줄 모른다. 그는 잔뜩 흥분한 채 로체스터의 새 안주인을 위한 보석을 찾고 비단옷과 면사포를 주문하고 결혼식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제인은 그가 부여해준 '로체스터 부인'이라는 호칭도, 그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질 신분과 위치도 낯설기만 하다. 이 행운이 어딘가로 날아가버리는 건 아닐지. 그의 열정이 곧 식어 이내 다른 남편들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한 달간 주어진 약혼 기간 동안 제인을 향한 로체스터의 달콤한 연정은 그칠 줄 모르고, 제인 또한 그 달콤함 앞에서 간신히 이성의 고삐를 쥐어 잡고 있을 뿐이었다.




옆집 엄마가 고민 상담을 해왔다. 최근 4학년인 둘째 아들 방을 따로 옮겨주면서 이 참에 독립을 시켜볼 생각이라고 했다. 아이도 흔쾌히 혼자 자보겠다고 하니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았다.


근데 언니, 내가 모성애가 과한 건지 애를 너무 예뻐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애는 혼자 자보겠다는데 내가 애를 못 놓겠는 거 있지? 그렇다고 남편이 싫은 것도 아닌데, 새벽녘이면 다시 고 녀석 침대에 기어들어가게 돼. 꼭 껴안고 다시 자는 게 너무 좋은 거야. 이런 내가 이상한 건가?


이상하긴! 너무 당연하다. 부드럽고 달콤 아이를 안고 자는 게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늙고 배 나오고 온몸에 털이 숭숭 난 남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예쁜 건 누구나 좋아한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

 

너무 자연스러운 감정이야. 남자가 젊고 이쁜 여자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지(!) 곧 애 이마에 여드름  올라오고 정수리에 냄새나기 시작하면 다 해결됨!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세상에 없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완벽하다는 말. 이전 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말. 짧지 않은 진통 끝 우두둑, 봉제인형 옆구리 터지는 것같은 느낌. 잠시 후 아래쪽에서 뭔가 썩썩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내 가슴 위에 올려진 벌건 핏덩어리. 그때만 해도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회복실로 옮겨지고 이내 곯아떨어졌는데, 해산의 격렬한 고통 끝에 찾아온 새벽의 잠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던 ‘완벽한’ 평온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러던 아기가 며칠 왕성하게 내 젖을 빨아 당기더니 붉은 태를 벗고 포실포실 살이 올랐다. 세상에나, 이렇게 완벽할 수가! 완벽한 생명체! 


그리고 ‘완벽하다’는 그 어려운 말은 앞으로 수없이 내뱉게 될 감탄사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가 젖을 먹고 단 한번 만에 꺼억, 트림을 올려주었을 때, 처음 내 말에 까르르 웃어주었을 때, 완벽했다. 그 작은 면적 안에 손가락 다섯 개, 발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있다니. 아기 똥구멍은 처음 만나는 완벽한 동그라미 었고, 처음 몸을 뒤집고 엎드려 나를 쳐다보던 보디라인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처음 “아빠빠빠”를 하고, 처음 엉덩이를 빼며 방귀대장 뿡뿡이를 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엄마 솜사탕 같아요,라고 첫 비유를 할 때에도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때로부터 13년이 흘렀다. 그 작던 손은 4배쯤 커지고 다리에 털이 올라오고 이마엔 여드름이 잔뜩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아이가 예쁘다. 식탁에서 뼈를 쪽쪽 발라 야무지게 고기를 먹는 모습만 봐도 좋다. 슬슬 형님처럼 사춘기 전조를 보이고, 엄마 제발 밥 먹을 때 쳐다보지 좀 말라고! 하며 빽, 소리를 쳐도 바로 물러서 지지가 않는다. 더 필요한 거 없니? 오늘 뭐 재밌었던 일 없었어? 하고 계속 껄떡거리게 된다. 아이가 내지른 한 번의 경고 사격에도 주체가 안될 땐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래, 너도 늙고 배 나온 여자가 빤히 쳐다보면 싫겠지. 나가면 젊고 예쁜 여자애들이 수두룩 빽빽일 텐데. 내 다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이런 객관적 비교가 마음을 멈출 필요가 있을 때 도움이 된다.


제인 에어의 첫사랑인 로체스터. 명색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명작의 남자 주인공인데, 그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후대 독자들에게 자주 욕을 얻어먹은 듯하다.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남자가 가난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현대적이지 않아서도, 이 남자의 과거가 비밀스럽고 복잡하다는 것 때문도 아니다. 후대 여성 독자들이 그를 욕하는 주된 이유는 패어팩스 로체스터의 신부가 너어무 '소녀 같은 신부'이라는 것. 기숙사를 나올 때쯤 제인의 나이는 열여덟. 책에서 로체스터는 그 나이의 두 배쯤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로체스터가 신분과 재산의 갭을 뛰어넘고 가정교사 출신의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 당시 가정교사는 고아 출신이 많았고, 그들이 처한 신분과 환경 때문에 자주 문란하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 매력을 느끼게 된 이유가 제인의 '순수함'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제인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계속 회고한다. 젊은 시절 자신도 얼마나 제인처럼 풋풋하고 선량했는지. 수수께끼 같은 운명이 그를 유혹해서 타락하기 전까진 그도 세상의 선의를 믿었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미 너무 멀리 왔고,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겠다고. 그런데, 너를 보니 다시 그 시절을 되돌리고 싶어 졌다고. 그에게 제인은 자신의 과거와 훼손된 순수성을 회복시켜줄 구원의 여성 - 단테의 베아트리체, 라스콜리니코프의 소냐 같은 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시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도 이런 구도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지금 하는 중이다. 늙고 하늘 같은 남편은 아내의 조언 따위 들리지 않는 벽창호인데, 부드럽고 달콤한 내 아들은 엄마 말이라면 쪼르르 달려와 경청한다. 그는 남편 한 번도 들어준 적 없는 시장바구니를 냉큼 들고, 나와 나란히 는 남자다. 그저 내가 해준 음식만 맛있게 먹어도 너무 예쁜데,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몸과 건강과 안색을 물어봐주는 남자. 다정함이란 열 집 건너 하나도 잘 없던 시절. 그렇게 아들들은 남편 대신 시어머니의 옆자리를 대신해준 남자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그 아들을 놓기가 그렇게 힘들었겠지. 아들을 남편처럼 떠받들고 살았겠지. 그런 아들의 사랑을 받는 젊은 여자가 질투 나기도 했겠지.


한국형 고부간 갈등의 해법이 '남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다. ( 남편들이여, 사랑받기 위해선 노력할지어다)


P.S. 참, 옆집 엄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집안의 모든 남자를 독립시키는 그 날엔, 집안에 강아지 한 마리를 들여오면 된다고. 가장 '부드럽고 달콤함이 남아 있는 놈'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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