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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0. 2020

26. 비밀

누구나 혼자 부르는 노래 하나쯤


당신은 왜 그런 여자를 집에 두는지 물을 거요.
우리가 결혼하고 딱 일 년 하고 하루가 지나면 이야기해 주리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두 가지 이상한 사건이 발생한다. 정원을 산책하다가 벼락을 맞아 몸통 한가운데가 두 동강이 난 채 뿌리만 간신히 이어진 마로니에 나무를 발견한 것. 어느 날 밤은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제인의 방에 들어와 면사포를 두 갈래로 찢어놓았다. 제인은 연이어 발생한 사건과 불길한 예감 앞에 두려워하고, 로체스터는 결혼하고 나면 그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결혼식 전날, 제인은 알 수 없는 미래 앞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의 <걸어도 걸어도>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는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장남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하나 둘 아버지 집에 찾아오며 시작된다. 준페이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남. 10년 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다가 물에 빠진 남자아이 하나를 구하고 대신 목숨을 잃었다.  '료타'는 한때 아버지와 형처럼 의사를 꿈꿨지만 지금은 회화 복원사가 되어 변변찮게 살고 있는 이 집 차남. 불안정한 직장 때문에 부모는 늘 아들이 밥은 먹고 사는지, 걱정이다. 게다가 얼마 전 멀쩡한 처녀 다 놔두고 '하필 아들 하나 딸린 과부'와 결혼해 적잖게 가족들의 핀잔을 듣고 있는 중. 겉으로 보기엔 비극과 희극이 적당히 섞인, 어느 일본 중산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보통의 가족이다. 감독이 카메라를 더 가까이 이 집안에 들이대기 전까진 적어도 그래 보인다.  


지금 가족들 앞엔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는 청년이 하나 있다. 장남 준페이가 구해준 '요시오'. 올해로 10년째, 그는 기일이면 이렇게 찾아와 죄인처럼 앉아 있다가 가곤 한다. "준페이 씨 몫까지 열심 살겠습니다"라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하지만 그가 떠나자 아버지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애 아니라도 되지 않은가. 기껏 알바나 하는 주제에." 이 딴 남의 집 자식 하나 때문에 내 귀한 자식이 목숨을 잃었다는 거다. 료타는 사람을 아래로 보고 하찮게 여기는 아버지가 맘에 들지 않아 몇 마디 쏘아붙이지만, 결국 서로의 해묵은 감정만 들쑤실 뿐이다.  


그날 저녁. 료타는 어머니에게 운을 떼어본다. 10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냐고. 너무 불쌍하다고. 이제 기일에 요기오 군을 부르는 거 그만두자고. 하지만 자상하기 그지없던 어머니는 뭐에 씌인 사람처럼 얼굴을 싹 바꾼 채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부르는 거야.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중오 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도 더 한 거야.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도 오게 만들 거야."
"그런 생각하면서 매년 부른 건가요? 너무했네."
"너무한 거 없어. 그 정도는 보통이지."
"모두 왜 그래요? 보통, 보통 하면서."
"너도 부모가 되어 보면 알게 돼."


어머니의 상처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내의 취향 운운하면서 자존심을 건드리자 '추억의 가요곡' 음반 한 장을 들고 나오는데, 알고 보니 젊은 시절 바람피우던 남편 뒤를 따라나섰다  음반이었던 것. 클래식만 듣는 줄 알았던 남편은 다른 여자 집에서 야릇한 가요를 흥얼거리는 남자였고, 어머니는 그날 이후 남편이 부르던 '푸른빛의 요코하마'가 수록된 음반을 사서 남몰래 듣고 있었다.


료타는 방에 돌아와 아내 '유카리'에게 말한다. 어머니가 그런 노랠 혼자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오싹하다고. 하지만 유카리는 그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냐며 이렇게 대답한다.

"숨어서 듣는 노래 하나쯤 누구나 있기 마련이에요."

료타는 당신도 그런 노래가 있냐며, 가르쳐 달라고 하지만 유카리는 비밀이라며 알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짓는다. 뒤이어 료타가 "무섭구나 여자는."이라고 대구 하자 유카리가 하는 말.  

"무섭죠, 사람이."


장남과 비교당하며 늘 부모님 기대에 못 미치며 사는 료타.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 하나를 데리고 재가한 유카리. 가부장적인 남편 권위에 눌러 평생 자식들만 바라보며 도리를 다하고 살아온 어머니. 겉으로 보기엔 모두 괜찮은 보통의 이웃들이지만, 저마다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오랜 시간 빚어온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과 익숙함 들은 그들에게 끝끝내 변화랄지,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화장실에 떨어진 타일쯤 거뜬히 고쳐놓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사위는 장모님이 해주시는 음식만 쏙 챙겨 먹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료타 또한 3대가 함께 축구장에 가보자고 했던 아버지와의 약속도, 아들 차 타보고 쇼핑하는 게 꿈이라던 어머니의 소원도 이뤄드리지 못한다. 현실은 늘 녹녹하지 않고, 자식은 늘 부모 마음대로 자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 늘 한 발쯤 늦은 깨달음. 비단 부모님에 대서만일까.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누군가와 평생 함께 하겠다는 약속.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얼마나 무모한 약속이었던가. 기쁨이야 어찌해볼 만하겠지만, 슬픔이나 괴로움도 함께 나누겠다니. 세상의 그 많은 사람 중에 이 사람과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는 확신은 또 어디서 왔을까. 그도 젊고 나도 젊었으니, 우리 서로 눈멀었으니 가능했던 약속들. 하지만 1년만 지나도 우리는 알게 된다. 결혼만큼 깨지기 쉽고 연약한 그릇이 없다는 걸.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만나 터무니없이 완벽한 꿈을 꾸었던가. 사람들은 흔히 아이가 태어나면서 신혼의 단꿈도 깨지기 시작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 나 사이 아이라는 놀라운 생명체라도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서로를 향한 적의가 하나의 놀라움에 경도되느라 허둥대지 않았더라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여태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토록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인간과 인간 사회에서.


그러니, 로체스터 씨. 당신은 지금 당신의 비밀에 대해 고백했어야 한다. 일 년 하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인생의 비밀 따위 서로의 사랑 앞에 한낱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그때. 그때였다며 어쩌면 제인도 당신을 용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 아직 눈멀고 귀먹었으니.


하지만, 로체스터 씨. 당신은 고백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도 어찌해볼 도리 없이 너무 큰 비밀이었기에. 나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  비밀을 무슨 수로 다른 이 앞에 꺼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닌, 이토록 사랑하는 여자 앞에.


그리고,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하는 것.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진심. 자꾸 미끄러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어디 즈음에... 우리는 모두 인생의 비밀쯤 하나 마음에 품고 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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