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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Mar 08. 2023

잃어버린 아들의 세계

거침없이 달려가던 아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고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살았던 나로서는 아들만 연거푸 둘이 태어나고 주변에서 딸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할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들이건 딸이건, 성별이 뭐 중요한가. 그저 내게 점지해 준 자식이니 그에 맞춰 살면 그뿐이지. 딸아이처럼 아침마다 긴 머리를 빗어 땋아주고 묶어주고 핀 꽂는 귀찮은 일 없어 좋고, 위아래 속바지니 스타킹 따위를 따로 챙겨주지 않아 좋았다. 그 정도가 내가 느끼는 아들과 딸의 차이였다.


본격적으로 아, 이게 바로 아들이구나~ 감지했던 건, 아들들이 뽀로로의 세계에서 파워레인저의 세계에 접어들 때였다. TV 속에서 처음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쫄쫄이를 입은 인간들을 봤을 때, 그 조야한 총천연색 옷차림과 우스꽝스럽게 흔들어 대는 팔다리가 얼마나 유치하던지! 빨래를 개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소파로 시선을 옮겼는데... 거기 소파에! 내 아들들이 눈에 하트 뿅뿅을 한 채 황홀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저녁마다 보자기를 두르고 눈에 레이저를 쏘고 검을 휘두르며 엄마 나 좀 봐봐요~ 하는 유치뽕짝 아들들에게 나는 속내를 감추고 눈빛 가득 놀라움을 담은 리액션을 날려주어야 했다. 아들에게 힘과 능력의 과시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아이의 눈높이, 아니 아들의 눈높이를 처음으로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아들의 세계는 그 후로도 주욱 스파이더맨, 아이언맨과 어벤저스, 최근 닥터 스프레인지와 앤트맨까지 소위 '시네마틱 유니버스'라고 불리는 영웅과 빌런들의 세계로 이어졌다. 내 눈에 그들은 어느 날 우연히 말도 안 되는 슈퍼 파워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서 악당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해 내겠다는 과대망상적 환상을 실현해 내는 인물에 다름 아니었건만... 흠, 그런 서사의 어떤 부분은 분명 우리 아들들의 깊은 무의식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몇 십 년 동안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은 뻔한 스토리건만, 지금도 후속 편이 나오면 여전히 아들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유년기 아들을 따라 원치 않는 마블 영화들의 계보를 좇다 보니 동화와 민담 속 여자와 남자의 원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타고난 미모와 착한 마음을 품은 채 하염없이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 모험과 난관을 헤치고 마침내 용을 물리쳐 공주를 차지하는 왕자. 그 신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여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남자는 도전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훌륭한 남편과 영웅 아들을 키워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보상받으며 살았는지. 치기 어린 영웅심은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성공신화로 매몰시켰는지. 그리고 지금 그 신화는 얼마나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지.


최근 아들들에게 유독 많이 나타나는 강박과 불안 등 부적응 사례를 접하면서 나는 다시 아들들 안의 이 영웅과 구원자 콤플렉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들에 관한 책들을 보면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것 중 유독 '아버지'와 '통과의례'에 대해 강조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가업으로 물려받는 일이 많았고, 때문에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보고 배웠다. 아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성인 남성들이 규정하는 통과의례를 치르며 자신의 용기와 힘을 시험받았다. 그것을 통과하며 당당히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성인식을 치렀고, 그것은 한 사회의 통과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의식이었다고 한다. 아들과 아버지는 그런 세계를 통해 함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자라왔다는 것이다.


지금의 아들들은 어떤가. 아버지는 아침에 헤어지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를 곳에 나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온다. 아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종일 '어머니들'과 함께 생활한다. 생물학적 어머니의 스케줄에 따라 아침을 먹고 등교를 하면 여선생님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꼼짝없이 앉아 공부를 한다. 그나마 몇 시간 안 되는 체육 시간은 여선생님의 컨디션에 따라 미뤄지거나 미세먼지 때문에 다른 수업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또 여원장님이 대부분인 학원붙잡여 머릿속에 지식을 넣고 앉아 있어야 한다. 


창을 던지고, 사냥을 하고, 용과 싸우던 그들 안의 수많은 영웅들은 하루종일 숨죽여 있다가 비로소 밤이 되면 핸드폰과 컴퓨터 게임 속에서 간신히 되살아난다. 침대에 지친 머리를 누이고 손안에 든 검정 상자 안에서. 하늘을 날고 폭탄을 터뜨리고 빌런에게 칼을 꽂으며 비로소 보상받는다. 그러니 그 상자 안에 빠져 영원히 나오지 않고 싶은 아들의 심정도 조금 이해가 간다.  


태풍이 북상 중이란 소식에 모두 한껏 들떠 있던 어느 해의 기억이다. 밖은 태풍이 전진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고, 집 앞 나무들은 그때마다 한차례 씩 머리채를 흩날리고 있었다. 특유의 밀도 높은 웅얼거림이 공기 중에 가득 차 있는 어느 여름 저녁이었다. 우리 어른들이 베란다 통창에 신문지와 테이프를 붙이며 태풍 대비에 분주한 동안, 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한껏 들떠 있었다. 그리고 태풍이 곧 절정에 이를 것 같던 시간. 집집마다 엄마들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일제히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태풍 전야 특유의 긴장감 사이로 사춘기 아이들의 괴성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간간히 바람에 실려 왔다. 그렇게 아이들은 밤새 집 안팎을 바람처럼 들락거렸다.


다음 날 아침 강아지 산을 시키러 나왔는데, 아파트 앞마당은 태풍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바람에 쓸려 나뒹구는 잔가지들. 그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걷는데, 불현듯 마음 속에 이상한 슬픔이 몰려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아들들은 물만 보면 무조건 뛰어들었다. 그게 계곡이든 수영장이든 공중목욕탕이든 거침이 없었고, 여름이든 겨울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닷가에 풀어놓으면 바로 신발을 벗고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고, 나는 내 아이들이 주욱 그렇게 자랄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살아내야 하는 것들이 어느새 좁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쳇바퀴처럼 살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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