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 낯선 타인을 상상하던

17개월 만에 마스크를 벗으며

by 쏭마담


이제는 많이 회자되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양인은 눈을 통해 감정을 읽고 서양인은 입을 통해 감정을 읽는다고 한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에 보면 일본인들의 최애 캐릭터 '헬로 키티'가 동양인에게는 인기가 많은 반면 서양에서는 반응이 냉담한 이유도 바로 키티에게 입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눈 위주(^^, ㅜㅜ)의 이모티콘이 많은 반면 서양에서는 : ). ;-( 처럼 이모티콘이 입 중심으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서양인들이 그렇게 마스크 착용에 예민하게 굴었나?


제일 신기한 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동안 떠돌던 유행어다. 마기꾼(마스크+사기꾼)과 마해자(마스크+피해자). 나도 마스크를 쓰고 만난 사람 중 마스크를 벗었을 더 호감형으로 변한 사람은 10 명중 1명 꼴 밖에 안된다. 그런 걸 보며 확실히 우리 얼굴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논리적으로 이상하다. 눈이 예쁜 사람이야 마기꾼이 될 확률이 높겠지만, 눈이 안 예쁜 사람은 마해자가 될 확률이 높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론 마기꾼이 훨씬 많으니, 동양인 중에서는 눈이 예쁜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일까?


이것도 좀 이상하다. 그렇다면 선글라스를 쓸 때 마해자, 아니 '선해자'가 더 많아야 하지만 우리 얼굴들은 대부분 선글라스를 쓸 때가 실제 보다 더 멋있어 보인다. 그 말은, 눈을 가릴 때 더 예뻐 보인다는 말씀! 동양인 중에 마기꾼이 많고, 같은 이유로 이목구비 중 눈 예쁜 사람이 더 많다면, 선글라스를 쓸 때 못생겨 보이는 사람도 훨씬 더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사람의 얼굴은 조금 가려 있을 때 훨씬 호감형이 된다.

(사람의 인격도 마찬가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날 때 굉장히 호의를 품고 만났구나, 싶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해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걸까. 눈만 남은 얼굴을 보며 그 눈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상상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그 지나친 상상력과 현실의 갭 덕분에 결과적으로 마기꾼 같은 신조어가 탄생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비난과 곡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본래 낯선 사람에 대해 이런 호의를 품고 만나는 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위로가 되었다.


얼굴과 감정에 관한 진화 이론 중에는 인간의 흰자위 이론도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거의 유일하게 흰자위를 가진 동물이다. 인간은 흰자위를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과 의도를 훨씬 더 잘 전달한다. 가령 위험한 동물이 나타나면 딱히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눈빛 만으로 위급상황을 알릴 수 있고, 그 위치를 표현할 수 있다. 그렇게 흰자위에 감정 표현과 원활한 의사소통이라는 쓸모가 더해지자 흰자위는 인간의 기본 형질로 자리 잡았다. 눈은 그 탁월함과 정교함 때문에 오랫동안 진화에 반해 '신의 설계'를 지지하는 증례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고도로 복잡하고 섬세한 기관이 단지 우연에 의해 인간에게 자리 잡았을 리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코로나19로 격리와 해제를 반복하는 기간 동안 눈의 기능과 중요성은 훨씬 더 커진 것 같다. 세기의 전염병으로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 같았던 일상생활은 순식간에 가상세계 안에서 다시 재편되었다. 학교 수업과 회사 업무는 물론 70대 노인들도 줌을 켜 해외에 사는 친척과 만나는 일이 이제 낯설지 않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모니터 안에 펼쳐진, 눈의 착시가 불러일으킨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건만.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메타버스, 아바타, 부캐와 같은 신조어는 재빨리 이 시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


팬데믹 덕분에 가상세계가 한층 빠른 속도로 우리의 현실세계를 대체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시장을 가지 않고, 은행을 가지 않는다. 노트북 앞에서 클릭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바닷가에 앉아 가장 최상의 조건에서 뿜어내는 에메랄드 빛을 내 눈에 담는다. 긴 줄과 관광객을 헤치지 않고도 최적의 예술품을 감상한다. 어렸을 때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미래 도시의 미래인의 삶을 내가 살고 있지만 지금 전혀 어색하지 않다.


17개월 만에 마스크 해제 소식을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지만, 나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외출 시 마스크를 챙긴다. 아니, 아직까지는 마스크를 조금 더 쓰며 지내고 싶은 걸지도. 며칠 후면 다시 마스크 없는 세상에 다시 익숙해질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도시의 미래인의 삶에 푹 젖어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가 지금보다 천천히 베일을 벗어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변화에 무뎌진 중년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예민한 아들 둔 엄마들만 아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