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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Mar 21. 2023

아들의 준비물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생긴 일

기질을 강화하고 약화시키는 엄마의 양육 태도


5학년 때쯤일까. 아들이 준비물이든 통신문이든 약이든, 챙겨가는 법이 없거나 챙겨가도 챙겨 먹지 않는 일이 일곱 번에 일흔 번쯤 계속되었다. 좀 이른 사춘기 조짐이었는지 그동안 자유분방한 내 양육방식이 극치를 이룬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때가 본격적으로 아들과 거리 두기를 시작한 때인 건 분명해 보인다. 아들이 엄마 말일랑 귀담아듣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자, 잔소리도 저절로 줄어들었다. 무용한 일에 나 혼자 치닫는 것도 한심해 보이고. 지가 아쉬우면 그땐 챙기겠지, 하는 딱 그런 심정이었다. 


어느 날은 실내화 챙겨가는 것을 잊은 아들이 집에 와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실내화 또 안 가져갔다~."

"응... 그랬구나.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전에는 몇 번 분실물 함에 있던 다른 친구 실내화를 빌려 신었다고 했었다)

"맨발로 다녔지." 

그러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덧붙였다.

"화장실도 양말만 신고 갔다~!" 


마치 동굴에서 박쥐라도 발견한 것처럼 녀석은 자신의 모험을 즐기는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유독 양말 바닥이 시커멓길래 그저 복도나 뛰어다니는 줄 알았던 나는 그만 경악하고야 말았는데!


그다음 해에는 할머니 집에서였다. 출발하기 전 누누이 얘기했다. 할머니 집에 가서 3박 4일 있다 올 예정이니 팬티 3장, 갈아입을 티셔츠 3장, 바지 2장, 잘 때 입을 츄리닝 한벌씩 각각 챙기라고. 미리 빨래 내놓으란 말도 여러 차례. 역시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렇게 떠난 부산 할머니 집. 2일째 되던 날인가. 어머니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었는데 아들이 물었다. 

"엄마, 팬티 여벌 가져온 거 있어?"


그럴 리가. 속으로 '그럼 네가 그렇지~' 하며, 팬티 내놓으면 밤새 빨아주겠노라 했는데... 3일째 되는 저녁. 아들이 그 후로 아무 요청이 없었단 생각이 그제야 퍼뜩 들었다. 

"아들? 너 팬티 어떻게 됐어?"

"그냥 입었지."

"정말? 3일 동안 내내 똑같은 팬티를 입었다고?"

내가 다시 경악하려는 순간 다시 아들이 말했다.

"아니~  뒤집어 입고 다시 뒤집어 입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만나면, 화보다 웃음이 먼저 나오기도 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5살 기억에 의하면, 아들은 씻고 난 후에 자기 침대(2층 침대였다)로 올라가기 전까진 그 손으로 난간도 잡지 않을 만큼 유별났다. 그러니까, 씻고 나면 아무것도 만지지 않은 채 침대 베갯잇 아래에 손을 쏙 넣어야 비로소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그전에 실수로 다른 물건이나 벽에 손이 닿기라도 하면 파랗게 질린 채 다시 내려와 손을 씻는 과정을 반복했다. 실상은 침구를 자주 빨지 않았기 때문에 그 베갯잇이 제일 더러웠건만;; 아들에겐 상관없었다. 물건마다 자기만의 청결지수가 있었던 거다. 


그런 아들이 사춘기를 지나며 옷을 갈아입지 않고, 이를 닦지 않고, 씻지 않고 잠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아들이 된 것이다. 나는 아들의 결벽증을 강화시킨 걸까. 약화시킨 걸까.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들이 이렇게 공부가 뒷전이 되고, 당장의 편안함 너머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에 내 양육 태도의 어떤 부분이 기여했을까. 혹 그때 내가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아 아들은 이렇게 매사 뒷걸음질 치는 아이가 된 건 아닐까. 엄마인 내가 보다 세심하게 챙겨줬다면 엄마의 무한한 지지와 안정감이 아들에게 날개로 작용했을까. 엄마 말일랑 귓등으로 듣든 말든, 약 잘 챙겨 먹었냐고 한번 더 물어보았다면, 내 잔소리가 지겨워서라도 아들은 한두 번쯤 약을 더 먹고, 그랬다면  환절기마다 비염을 달고 사는 아이가 되진 않았던 게 아닐까. 아들이 아무리 손사래를 치더라도 억지로라도 그때 무릎 담요를 쥐어줬다면, 한여름 냉방병 같은 건 안 달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때 한번 더 얼르고 달랬다면, 마지못해 한번쯤? 그 한 번쯤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습관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나와 달리, 매끼 집밥은 물론 방과 후 수업까지 시간 맞춰 세심하게 챙겨 주는 '옆집 엄마'가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무관심과 그녀의 관심 모두 각각의 아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 보이던 어느 저녁이었다. 아마도 그때쯤 나온 각 과목 중간고사 점수를 보면서 서로 실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야, 우리가 정성을 들이든 말듯, 어차피 공부 안 하는 건 똑같지 않냐? 난 이제 정말 아들한테 신경 끄고 내 후반전이나 고민할래."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나마 신경 쓰니까 이 정도라도 받아오는 거야." 


그러게. 우주도 간절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응하는 법이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빨리 아들을 포기하는 엄마가 된 것일까. 포기와 독립 사이를 수식하는 수많은 언어와 해법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여전히 헤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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