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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Mar 21. 2023

아들, 이지 고잉(easy going)

이 정도면 과히 시대적 징후라 할만했다

- 오렌지에 얽힌 이야기 둘. 

아침에 어제 까놓은 오렌지를 한입 입에 넣은 아들이 말한다.

"엄마, 이렇게 오렌지 좀 까놔줘. 내일 아침에 먹게. 겉이 살짝 마르니까 더 맛있어."

굴러다니던 오렌지를 어떻게 처치하나, 하던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더니, 아들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덧붙였다.

"정말이라니깐~ 오렌지에서 멜론 맛이 나."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식탁에서 말이 많았다. 대화를 했다는 게 아니라, 음식을 차려 놓으면 이건 좀 싱겁네, 이건 좀 뜨겁네, 이건 엊그제 먹은 거 아니야? 품평이 많았다. 그러면 남편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된장을 한가득 퍼 밥에 쓱쓱 비벼먹고 보란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렸다. 아무거나 차려주는 데로 먹을 것이지, 사내아이가 음식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투정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거다. 엄마인 내 눈에는 아들이 워낙 맘에 담아두지 않고 표현하는 스타일이라 그냥 넘어갈 만도 했는데, 남편에겐 아들이 불평하는 남자로 보였던 거다. 그러니 적잖이 불안하기도 했을 거다. 아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자기 회사의 신입사원들처럼 될까 봐. 


그런 아들이 사춘기가 되고, 거절하는 걸 밥 먹듯 하게 되자...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이제 샌드위치 먹기 싫어."

"왜? 너 엄마가 만들어주는 거 맛있다며?"

"먹을 때 옆으로 자꾸 흘러내려서 귀찮아."


그러더니, 어느 날은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했는데, 발라먹기 귀찮다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날부터는 치킨도 순살만 시켜 먹기 시작했다. 갤럭시에서 아이폰으로 바꾸면서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아이폰의 매력에 폭 빠진 그 시기, 핸드폰 사용 시간 때문에 격렬한 싸움을 몇 번 치르고 나 또한 이제 나 몰라라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지도 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들의 예민함이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 무기력함으로 뒤바뀌는 것을 목도하던 때. 내가 이런 아들의 만행을 성토하자 엄마들 반응 또한 열렬했다. 한결같이 우리 집에도 "그런 분 계시다"며 입을 모았다. 


아들마다 왜 이렇게 예민들 하신 지. 몸의 예민함 뿐 아니라 한 번씩 틱으로 대변되는 강박, 새 학기와 시험 때마다 화장실에 들락거려야 하는 불안, 스트레스받으면 가슴이 조이거나 하는 공황, 결심했다가도 쉽게 꺾이는 의지박약에, 이런저런 자잘한 흥미는 분출하는데 금방 흐트러지는 과잉행동과 주의력 결핍까지. 우리가 신경증이라 명명하는 기준들 중 정도만 다를 뿐 모두 항목 한두 개쯤은 다 해당이 되었다. 남편이 늘 말하듯, 학생이라면 맡은 바 본분을 다하고(공부하는데 왜 100점을 못 맞아?), 의지를 세웠으면 바로 실천하고(왜 너는 늘 다음 시험부터 잘 본데?), 기본은 지키며 사는(제 때 먹고 제때 자고 제때 씻는) 그런 당연한 아들은 없었다. 


이 정도면 가히 시대적 징후라 할 만했다. 


그때부터 양육서 너머 신경정신 질환, 뇌과학, 사회과학과 인문 서적을 넘나들며 아들과의 교집합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집한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다양성과 선택의 문제.

자유로부터의 도피 or 책임과 회피. 

여성 인권 신장과 남성 역차별. 


이런 단어들이 우리 아들들을 이지 고잉(easy going) 하게 하고 있었다. 핸드폰은 갑각류들이 숨어 들어가는 단순한 겉껍질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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