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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Mar 21. 2023

아들 방 청소를 왜 엄마가 해?

남자도 전업주부(專業主夫)로 좀 살아봐도 되지! 


- 오렌지에 얽힌 이야기 하나.

"엄마, 나 오렌지 먹고 싶어."

"엄마 지금 바빠. 싱크대 위에 있잖아. 먹고 싶으면 네가 까먹어."

"나 오렌지 못 깐단 말이야"

"오렌지를 왜 못 까? 세로로 칼집 내서 까먹으면 되지."

"오렌지 까면 손톱에서 이상한 냄새난단 말이야~"




결혼하고 처음 나는 남자들이 귤을 까먹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물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남자들이 고기도 굽지 못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지만. 시댁에 내려가서 한 번도 어머니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음식에 진심인 어머니는 늘 발을 동동 구르며 음식을 볶고 지지고 퍼 나르기 바빴고, 아들들은 잘 먹어주는 것만으로 어머니의 기쁨이 되었다. 아들들이 고기를 먹고 나면 어머니는 다시 귤을 깠고, 아들들이 고기만 먹지 않고 과일까지 골고루 먹어주는 것만으로 어머니들은 흐뭇해했다. 


그 아들이 자라 결혼을 하자, 고기 굽는 일은 다시 며느리가 넘겨받았다. 시어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느긋하게 앉아 밥 먹을 수 있는 며느리가 몇 명이나 될까. 


아내가 구워준 고기를 질릴 만큼 먹은 아들들에게 어머니가 묻는다. 

"고기 더 구울까? 더 먹을래?"

"아니요, 어머니. 저희 다 먹었어요. 이제 더 못 먹어요~~."

옆에서 여태 남자들 챙기느라 고기 한 점이 입에 넣어보지 못했던 며느리들 속에서 뭔가 불쑥 올라온다. 


그 아들들이 아버지가 되고, 며느리들이 "나는 아직 굽느라 고기 한 점도 못 먹었거든?"이라는 말을 '감히' 하게 되고, 그렇게 시대가 변하는 동안. 나는 다시 오렌지를 먹고 싶지만 오렌지를 못 까먹는 아들과 조우하고 있다. 고기만 먹고 과일 안 먹는 아들도 많다는데... 오렌지 좀 까줄 수 있다. 까줄 때도 있고, 그러다 잊을 때도 있다. 뭐 이런 거까지 고민이냐 하겠지만...  아들과 분리 독립하는 중 우리는 수없이 많은 오렌지와 만나게 된다. 양말을 신는 것부터 혼자 치카치카와 목욕을 하고 준비물을 챙기고 숙제를 도와주고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는 것까지. 엄마가 하는 것이 당연했던 분야를 서서히 아들에게 내주며 하는 고민들. 


아들 사춘기 동안 방 정리하는 걸로 내내 실랑이 중이라고 내가 어느 모임에 가서 얘기했을 때. 선배맘 하나가 내게 이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왜 아들 방 청소를 아들이 해? 엄마가 안 해주고?" 공부할 시간도 없는 아들에게 왜 방청소까지 시키냐는 거다. 아마 큰아들이 작은아들처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면 나도 그런 요구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큰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에서 두문분출하며 공부를 안 해도 될 수만 가지 핑계를 대고 있었고, 우리 중 누구보다 시간이 많아 보였으며, 나는 하필 그때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는 챕터가 있었고, 그래서 그때가 '우리 집 아들'에게는 자기 방 청소라도 내어주어야 할 적기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아하, 그래서 모범생이던 내 남편은 귤을 까 보지 못하고, 고기를 구워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 아들에게 자기 방 청소를 시키는 엄마가 몇 명이나 될까? 공부만 잘한다고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공부만 하면 모든 걸 허용해 주는 엄마가 된 걸까. 공부 잘한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오렌지라도 깔 줄 아는 남편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 지도 오래되었으면서. 우리 아들들 시대엔 '바깥일' '집안일' 없이 남녀가 모두 함께, 똑같이 나눠하게 될 거라는 것도 알면서. 


공부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불안해질 때마다 생각한다. 적어도 방청소가 엄마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줄 알게 되고, 스스로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 첫 계란말이에 도전해 본 아들이 능숙하게 계란 말아 부치는 걸 보며 또 생각했다. 어쩌면 근미래엔 집안에 능숙한 남자가 더 각광받는 시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하고. 2천 년이 넘게 남자는 바깥일로, 여자는 집안일로 규정되어 온 시대가 이렇게 빠르고 강력하게 뒤집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남자들도 전업주부(主夫)로 좀 살아봐도 되겠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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