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Oct 07. 2023

아이의 잠재력을 부모의 시각으로 제한하지 말 것!

마지막으로 신앙의 선배를 찾았다



두 진단 사이에서 여전히 맘을 잡지 못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신앙의 선배를 찾아 상담 요청을 했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창 아들 사춘기 때문에 여기저기 어두운 기운을 푹푹 풍기고 다니던 내게 유일하게 '들리는 조언'을 해주신 분이다.


"집사님, 저는 아들 사춘기 지내면서 인간의 밑바닥을 다 보았답니다. 애가 어쩌면 저렇게 강퍅하고 무심한지, 속이 너무 상해서 어느 날은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아, 저 아이는 부모 말로는 안 되겠구나. 하나님이 치셔야 돌아오겠구나, 하고요. 에미가 돼가지고 아들 저주하는 기도라니오. 그런 제 자신이 너무 형편없어 또 죄책감에 허우적거리고요. 그렇게 다시 악순환. ㅠㅠ"

"집사님, 저도 아들 사춘기 때 용서를 비는 기도 많이 했답니다."

"네? 용서요?"

"네. ^^ 저는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만드는 저 '새끼'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하고요. 집사님, 욕하고 마음껏 토로하셔도 돼요. 시편의 기도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기도가 아니라 정직하게 통회하는 기도를 더 기뻐하시잖아요."


이번에도 역시나 집사님은 내 상담 요청에 한걸음으로 응해 주셨다.


제 아들은 몸과 마음 모두 어렸을 때부터 예민하고 그래서 뭐든 감각적으로 크게 받아들이는데 어렸을 때 제가 부모로서 권위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서 좋은 습관을 들여주지 못했고 그게 해야 할 일을 자꾸 회피하는 빌미를 제공한 데다 사춘기 때 핸드폰과 게임 중독 문제를 두고 끝까지 싸우지 못해서 완전히 아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다 보니 공부할 시기를 놓쳐서 스트레스 상황을 회피하는 아이가 되었고 그 경향은 또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내 아버지의 성향인데 그걸 아들 안에서 발견하면서 동시에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그러다 보니 평생 아들이 저렇게 갈등을 회피하며 살다가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그렇고 그런 히키코모리가 돼서 집구석에 처박혀 평생 안 나오게 될까 봐 그게 다시 저를.... 어쩌고 저쩌고...


1시간이 넘도록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풀어놓은 내 오랜 이야기에 담담하게 귀 기울이던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OO는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 집사님, 제가 모든 걸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오히려 아이 마음 헤아려 주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눠주는 게 더 필요해 보여요. 굳이 고쳐야 될 게 있다면, 집사님 스스로 OO가 이렇고 저렇고, 이래서 저래서, 그렇게 아이를 자꾸 판단하는 것부터 안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는 집사님 아버지와도 완전히 다른 존재죠. 연결시켜 생각하시지도 마세요. 아이는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씨앗이잖아요.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한다고 이제 들을 나이도 아니고요. 아이는 부모 뒷모습 보고 자란다는 말 저는 동의하거든요. 아이들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안 하고, 부모가 하는 대로 하죠. 제가 알고 있는 집사님이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하나님이 아이에게 주신 잠재력을 자꾸 부모의 시각으로 제한하지 말고, 당분간은 판단유보하고 바라볼 것.


"그리고요, 무엇보다 집사님 스스로를 너무 참소하지 마세요. 너무 힘들어 보이세요. 그때 이걸 놓쳤고 저걸 잘못해서 아이가 그렇게 된 거다 같은 거요. 그동안 충분히 애 많이 쓰셨어요. 이제는 이런 내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나 자신부터 위로하고 보듬어 주세요."


동시대 나와 비슷한 아들의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집사님의 오랜 내공을 알기에, 마지막 말에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참소하는 사람. 나의 우울한 기질과 지나치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어떤 점이 그동안 나와 아들 사이를 유령처럼 잠식하고 있었다. 그게 아들의 가능성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아들에게 그대로 날아가 꽂혀 아들의 미래까지 깎아내리는 무언의 언어가 되었다.


아들과 나 사이를 가리고 있던 오랜 장막이 비로소 걷어지는 기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꿋꿋하니 얼마나 좋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