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서울 친구 모임. 조촐한 가을 여행 계획을 짜는 도중에 8년 전 우리가 함께 한 제주 여행이 화제로 떠올랐다. 2015년 여름 방학, 제주 한달 살기가 막 엄마들 사이에서 물망에 오르내리던 해. 나는 친구 둘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에서 10일 살기를 했다. 남들은 애들 데리고 유학도 가고 어학연수도 간다는데, 국내라면 따로 비용도 들지 않으니 도전해 볼 만하다 싶어 내놓은 제안을, 우리 셋 모두 덥석 물었던 거다. 우리 중 가장 큰 애가 5학년, 게다가 한 친구는 다섯 살 배기 늦둥이까지 달고 있었으니 그리 가벼운 여행은 아니었다. 급하게 집을 구하다 보니 여의치가 않아 숙소 또한 화장실 하나밖에 없는 작은 신축 연립에서 열 명이 함께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바닷가와 오름과 골목길을 쏘다니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함께 한 추억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운을 뗐을 때 우리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때 나 좀 힘들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 하는 표정으로 우리가 동시에 쳐다보았더니, 친구가 핫핫핫~ 웃으며 오래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때 OO이가 다섯 살이라 엄청 어렸잖아. 나는 내심 OO를 내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근데 너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서 좀 놀랬어. 물론 3일 째까지 딱 힘들고, 그 담부턴 괜찮았지만."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날에 대한 평가에 OO이 엄마인 친구와 나 모두 깜짝 놀랐지만, 그 친구가 한 얘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푸하하. 맞아. 난 그때 내 새끼 화장실 들락거리는 것 때문에 그거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어. (그때도 우리 집 예민한 첫째는 바깥 화장실을 잘 못썼고 들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려 다른 사람들을 좀 지체시키고 했던 거다). 그리고 난 네가 유난히 OO이 챙기는 건 알았지만, 그건 네가 워낙 애를 잘 다루니까 그냥 몸에 밴 거라고 생각했지, 네가 힘들지만 일부러 도맡았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어! (그 친구는 그 당시에도 딸 둘을 너무 정석대로 멋들어지게 키우고 있었고, OO이 엄마와 나는 맨날 아이들 때문에 허둥거리는 약간 그런 구도였다)"
그러자 옆에서 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OO이 엄마도 한마디를 얹었다.
"솔직히, 나도 첨에 좀 힘들었어. 난 그때 우리 애들이 너네 애들 사이에서 잘 못 어울리는 거 같아 속상했거든. 그래서 나도 딱 이틀 힘들었다!"
이번엔 우리 셋 모두 일제히 "정말??"을 남발하며 박장대소했다.
"뭐야~ 그럼 니들은 다 공동생활 적응 하느라 힘들었는데 나만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이 일로 나의 '서울 깍쟁이론'이 불거졌다. 제주 여행 때 숙소를 잡고 나서, 다시 비행기 표를 의논할 때였다. 우리는 처음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하고 티켓을 알아보았는데, 극성수기다 보니 비행기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남편 마일리지 찬스를 써야겠다 싶어, 티켓을 따로 끊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비용을 아끼는 일이 중요했던 나에겐 우리가 여행의 첫날 따로 제주에 도착한들 그게 함께 하는 우리의 여행에 살짝이라도 균열을 내는 결정이 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근데 그때 친구가 처음 나에게 이렇게 말했던 거다.
"그때 네가 약간 뭐랄까, 서울 깍쟁이 같았어."
그때도 나는 "너처럼 남편 지원 당연한 듯 받는 애는 나처럼 돈 쓸 때 남편 눈치 봐야 하는 내 심정 모를 거다"라고 항변했지만, 아마 그 일은 이후 다섯 살 배기에 대한 내 태도와 함께 나의 '서울 깍쟁이론'을 강화하는 단서가 되었던 듯하다.
내가 또래 친구들보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건 알고 있었다. 5년 전쯤 시부모님과 함께 9박 10일 터키 여행을 다녀왔을 때에도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한 여행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다른 며느리들 같았으면 젊은 사람들 일정에 맞춘 그 긴 여행 중 관절이 좋지 않은 시부모님의 안위를 살피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적잖이 마음을 쓰기도 했으려나. 하지만 시부모님에 대해서도 나는 어느 순간부터 '함께 할 때 즐겁기 위해 더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라는 철칙이 있었다. 시부모님께 맞추고 너무 잘하려다가 어긋난 며느리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 함께 하는 것보다는 각각의 독립적인 생활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결혼생활을 꾸려왔다. 이 남자와 '함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싸울 만큼 나에게 싸움에 대한 기술도, 근력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내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내가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두른, 일종의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태도가 동성의 또래와 함께 할 때 혹은 공동의 육아에 있어 이기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제주 여행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나는 그때도 내 아이 때문에 동동거리는 엄마였다. 내 아이가 화장실을 오래 써서, 불안이 높아 다른 일행들의 출발 시간을 지체시키고,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내내 그것에 꽂혀 있었다. 게다가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잘 다루지 못한다는 자괴감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다섯 살 배기라는 남의 아이를 내가 떠맡아 다른 사람보다 잘 데리고 놀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엔 아이를 잘 보는 친구가 있지 않은가. 잘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스스로에게도 자긍심을 주고, 결과적으로도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낸다.
생각해 보면, 교회라는 공동체 모임이 많았던 내 주변에는 늘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동동거리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늘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에 있어 나보다 뛰어났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돌봄 재능에 대해 늘 위축된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센스 좋은 이들이 차린 식탁에서 나는 대접받는 수혜자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쓰임이 있는 그 순간을 더 뿌듯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거다. 그러니 나보다 재능 있는 여자가 있는 공간에서 나는 늘 뒷전에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어딘가에 잘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그 태도가 공동체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요즘 다시 여러가지 생각이 밀려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