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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22. 2022

마나님이라는 허울

어른이 되면 이 정도는 하며 살 줄 알았지



"우린, 절대~~ 학원비 벌러 일 나가진 말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새끼손꾸락' 걸며 맹세했던 지인이 대여섯 명쯤 된다. 수완 좋고 부지런한 옆집 엄마들이 파트타임을 나가기 시작할 때도, 우린 서로의 집을 오가고 품앗이 공부방을 열며 버틸 때까지 버텨 보자 다짐했다. 학원비 벌러 원치 않는 일을 하러 나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약속을 굳게 붙들며 살고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어린이집 보조 교사로, 장애학생실무사로, 식당 보조로, 그리고 나처럼 학원 파트타임으로 나가 모두 일하고 있다. 2-3년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 생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도 뜻밖의 모험이라면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 나이 사십에 혹은 오십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예전에도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맞벌이를 접고 집안에 들어앉을 때. 내가 다시 돈을 벌러 일을 나갈 거란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남편이 여느 집 남편만큼은 벌어다 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명품을 걸치고 마사지를 받는 사람은 아니니, 여태 그래왔듯 마음껏 누리며 살진 않아도 남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은 살 거란 막연한 예상 같은 게 있었달까. 적어도 옆집만큼은 하고 살지 않을까, 하고. 이 나이쯤 되면 한 번쯤 부모님 틀니 정도는 카드로 긁어드리고, 칠순이나 팔순 때 비행기 태워 동남아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보내드릴 줄 알았다. 강남 사는 친구들이 하고 내 언니가 하는 일이니, 나도 하며 살 줄 알았다. 어른이 되면 하고 다들 하고 살 줄 알았던 평균치라는 게 얼마나 상향 평준화된 평균치인 줄 몰랐다.


학원비 벌러 세상에 다시 나와보니, 세상엔 왜 또 이렇게 부지런한 여자들이 많은지! 이웃의 스터디 카페 사장님은 알고 보니 부업으로 과일 개별포장 알바를 하고 있었다. 오전에 대기업에 납품할 샌드위치를 만든다던 친구는 틈틈이 과수원 하시는 아버지 택배 주문부터 클레임까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나처럼) 아이 둘 키우면서 (나와 달리) 살림 야무지게 하면서 그 모든 걸 거뜬히 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들은 건, 새벽 댓바람부터 나가 하루종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동네 친구 얘기다. 아들이 축구선수라 맨날 원정 경기 좇아 다니고 픽업 다니느라 바쁜 건 알았지만, 그 와중에 아파트 통장일 까지 하면서도 지인들 생일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얼마나 잘 챙기는지. 대체 남편이 얼마나 잘 벌어다주길래? 하고 어느 날 내가 묻자, 이렇게 속삭였다.


"사실 저 얼마 전부터 친정엄마가 하시던 직업소개소 일을 받아하고 있어요. 어디 건물에 청소할 사람 몇 명 필요하다고 하면 알선해주고 수수료 받는 그런 거요. 근데, 아줌마들 태우고 다녀 보니 오전에 2-3시간만 청소해도 몇십만 원쯤 거뜬히 벌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줌마 4명 필요하다고 하면 3명만 불러다 가서 제가 한 사람 몫까지 하고 와요. "


알선만 해줘도 충분했지만, 내가 할 수 일이 당장 돈이 된다 싶으니, 남 주기 아까웠다고 했다. 


"남편이 못 벌어다 주지 않거든요. 근데 저는 페디큐어도 해야겠고, 한 번씩 미용실 가서 큐티클도 받아야겠고, 계절 바뀌면 이쁜 청바지도 사 입어야 하겠는데... 차마 남편 돈으로 그거까진 못하겠더라고요."


이렇게 야무지고 부지런한 여자들 미담을 하루 건너 전해 들으며, 나는 요즘 계속 까무룩 숙연해지는 중이다. 사춘기 아들이 힘들게 한다고 죽고 싶다고 징징대던 내 모습, 강남 친구들과 비교하며 왜 내 남편은 이것밖에 못 벌어다 줄까, 하소연하던 그동안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지난번 형님과 통화 때도 비슷한 얘길 나눴다. 최근 형님도 공부방 알바를 몇 군데 경험하셨는데, 아~ 공부하기 싫다고 몸 비트는 애들 끌어 앉혀 공부시키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더라, 류의 이야기였다. 그 마음 모를 리 없는 나도 바로 맞장구를 치며 대구 했다.


"그렇죠, 형님? 차라리 쿠팡 바코드를 찍으러 나가는 게 더 속편 하지. 저희 꽈는 그렇잖아요. 사람 상대하느니 물건과 대거리하는 게 더 나은 거죠."


전화를 끊고 나니, 혹 불행에 불행이 겹쳐 길바닥에 나앉는 일이 생기더라도... 바코드 찍으며 내 몸뚱이 하나는 건사하고 살 순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마나님'이라는 그림자도 허울처럼 걸치고 살았구나 싶었다. 내 몸뚱이 하나 부지런히 움직이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그동안 내가 '원치 않는 일'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게 추운 컨테이너 건물에서 부지런히 몸을 쓰는 일이건, 따듯한 실내에서 머리를 쓰는 일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만의 쓰임을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  


그게 평생 남편과 자식으로 규정되는 인생보다는 적어도 내겐 더 정직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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